▲<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영어판 출간마르크스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한글판과 영어판을 동시에 들고 있다.
임승수
3. 정공법으로 돌파
영어권, 특히 최대 시장 규모의 미국에서는 수많은 작가의 책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나온다. 그 작가들의 글이 딱히 한국 작가의 글보다 뛰어나서 미국 출판사가 책으로 출간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 작가들의 원고는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회를 얻는 것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 미국에서 출간되기 위해서는? 나도 미국 작가들처럼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원고를 통째로 영어로 번역해서 주면 된다. 그들이 읽어보고 출간 여부를 판단할 테니.
문제는 번역비용이다. 영한번역보다 한영번역비가 훨씬 많이 드는 데다가 마르크스 <자본론> 해설서의 번역은 단순한 영어 번역과는 또 다르다. 그런데, 인생이란 참 신기하다. 꼭 이럴 때면 절묘한 타이밍으로 돈이 생긴다. 우리 아파트 앞에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일조권이 침해됐는데, 관련 보상금으로 계좌에 딱 번역비만큼 입금된 것 아닌가. 번역자도 페이스북 인맥을 통해 추천받아 수개월 만에 책 원고를 성공적으로 번역했다.
4. 예상치 못한 난관
드디어 미국 출판사에 투고하는 일만 남았다. 기왕이면 메이저 출판사에 투고하고 싶어 펭귄랜덤하우스 출판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FAQ 메뉴에서 원고 투고 관련 내용을 읽는데, 다음 같이 적혀 있는 것 아닌가!
Penguin Random House does not accept unsolicited submissions, proposals, manuscripts, illustrations, artwork, or submission queries at this time.
펭귄랜덤하우스는 개인의 원고투고는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알아보니 영어권 메이저 출판사는 어디나 개인 원고투고는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무리 큰 출판사라 하더라도 누구나 원고투고가 가능하다. 반면 영어권은 워낙 출판시장이 크고 작가 지망생도 많다 보니, 개인 원고투고 창구를 열어놓으면 업무가 마비되기 때문에 개인 투고는 받지 않는다.
대신 'literary agent'라 불리는 대리인이 작가와 메이저 출판사 사이에서 일종의 관문지기(gate keeper) 역할을 한다. 메이저 출판사와 계약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대리인에게 원고가 선택되어야 한다.
대리인은 출판 계약이 성사되면 작가의 인세 수입 중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받는 구조다. 요컨대 영어권 메이저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려면 이 대리인과 접촉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내가 미국 대리인의 연락처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민 끝에 해외 번역출간을 중계하는 한국의 에이전시를 통해 영어권 출간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국 에이전시들은 해외도서의 국내출간 및 국내도서의 해외출간에서 중계를 하며 수수료 수입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영어권의 출판사 및 대리인들과도 일상적으로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한국 에이전시를 통한 영어권 출간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회과학 도서의 영어권 수출이 전례가 없다 보니, 한국 에이전시들도 사회과학 도서에 관심을 보일 만한 영어권 대리인을 알지 못하는 거다.
5.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직접 찾아야
목마른 사람이 직접 우물을 찾아야 하는 법! 내가 직접 연락처를 찾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이 바로
http://www.writersmarket.com/ 이다. 이 사이트는 유료 회원제로 운영되는데 회원비가 한 달에 5.99달러다.
회원이 되면 사이트의 정보를 열람하고 검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데, 영어권 출판사와 대리인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학을 관심 분야로 선택해 검색하니 백 명이 넘는 대리인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화면에 나타난다.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제안서와 샘플 원고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장이 죄다 거절이다. 왜 이렇게 거절만 할까 고민했는데, 역지사지하니 답이 나왔다.
대리인의 수입은 (자신이 계약을 성사시킨) 저자가 받는 인세의 15%다. 만약 한국 작가가 쓴 마르크스 <자본론> 해설서를 메이저 출판사에 추천해서 계약되면, 대리인은 인세의 15%를 꾸준히 떼가는 거다.
내가 대리인이라면 우선 미국 작가가 쓴 마르크스 관련 서적의 판매현황을 볼 것이다. 거의 안 팔린다. 판매가 처참하다. 그렇다면 한국 작가의 마르크스 관련 서적의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 예상되는 자기 몫의 수수료가 빤히 보인다. 들인 품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너무 적으니 당연히 거절이다.
6. 현실적으로 가능한 루트를 찾다
대리인을 통해 메이저 출판사와 계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메이저 출판사는 포기하고 개인 투고를 받는 중소규모의 사회과학 출판사를 공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http://www.writersmarket.com/ 에서 개인 투고를 받는 사회과학 출판사를 따로 검색해서 해당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원고에 관심이 있다는 답장을 몇몇 출판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중에 가장 진지한 관심을 보인 Algora Publishing과 계약을 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영어판이 출간됐다. Algora Publishing은 뉴욕 소재의 출판사로 1983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수백 종의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한 좌파 출판사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무덤인 미국에서의 출간이라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투입한 번역비조차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수의 독자에게나마 인상에 남는 책이 된다면 작가로서 뿌듯함을 느낄 것 같다.
한국에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책, 그것도 사회과학 책은 상업적으로 나에게 큰 보상을 주지는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그 책을 쓴 사람에게, 그 책을 썼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미래를 선물해준다. 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내 인생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그 흥미진진한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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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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