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및 분수대 광장과 전일빌딩(왼쪽 큰 건물). 전일빌딩은 계엄군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5.18항쟁 역사의 현장이다.
권우성
광주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시위의 지도부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그리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여러 곳에서 참여했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면서 시위 가담자가 훨씬 많아지고, 연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 시위는 오전보다 훨씬 밀도있게 전개돼갔다. 오후 2~3시를 넘기면서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시위의 물결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가로변의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게 음료수와 빵 등을 공급, 무언으로 격려했다. 시위대가 점차 불어나고 구호의 내용이 격렬해지면서부터 시민들 중 상당수는 직접 학생들의 대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거의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 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 명의 또다른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이들은 합세해서 광주천변 도로를 따라 황금동 입구의 구시청 부근으로 나아가 충장로 입구와 도청앞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시위대는 도교육위 쪽으로 방향을 선회, 돌을 던지며 '어용교육집단'이라고 규탄했으며, 인근의 호화주택(화천기공사 사장 저택으로서, 개인집으로는 가장 호화주택으로 알려져 있다)에도 일제히 돌을 던지기도 했다. (주석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