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의 모습
연합뉴스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김한중(20세)이 "여기서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도청으로 갑시다"라고 외쳤고, 모두들 공감하여 시위장소를 도청쪽으로 옮겨갔다.
5월 18일 오전, 공수대원들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은 한적한 전남대 정문보다 시민들의 왕래가 많은 도청 앞에서 시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그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10일 동안 광주시민들에게 공포와 분노의 대명사가 된 공수부대와의 첫 격돌" (주석 9) 이 시작된다.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면서 공수부대의 진압은 더욱 난폭성이 심해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구호를 외치며 군경의 곤봉과 페퍼포그에 돌멩이로 맞섰다.
곤봉세례를 피해 교문 앞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광주역, 공용터미널, 카톨릭센터 등을 거쳐 도청 앞 진출을 시도한다. 경찰의 저지에 막혀 학생들이 중간집결한 곳은 공용터미널과 가톨릭센터, 두 군데의 참여 학생수가 각각 5백여 명을 넘어서자 경찰은 가스차 등을 동원, 해산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공용터미널 대합실 내에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돼, 시민들의 분노와 함께 이날 오전 시위를 격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찰 저지에 막혀 도심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오전 시위 상황은 충장로파출소와 동명파출소 등의 유리창이 부서지는 등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초보적인 항의시위 수준을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