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서울의 봄'을 기억하는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군중들로 붐볐다. 이들은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게 된다.그대는 '서울의 봄'을 기억하는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군중들로 붐볐다. 이들은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게 된다.
김천길
광주의 시민들도 10ㆍ26사태 이후 평온한 가운데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더 이상 차별받지 않은 지역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의 봄' 아니 대한민국의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신군부의 정권야심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박정희 시대, 학생ㆍ지식인ㆍ농민ㆍ노동자들의 반유신 투쟁과 특히 1980년 봄에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광주의 대학가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재단비리 척결, 어용교수 축출, 학생회 부활 등 학원민주화를 시작으로 유신잔재 청산과 과도정부의 조속한 종식, 그리고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가 중심이 되었다.
5월 14일 오후에는 교문 앞에 포진한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주시내로 진출했다.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한 학생들은 12ㆍ12 군부반란의 진상과 신군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잔당과 전두환ㆍ신현확 등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시위집회를 평온리에 마친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학교로 돌아왔다.
15일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이어졌다. 이날의 시위는 그동안 재단비리에 집중해 있던 조선대와 광주교대생들까지 참여하여 규모가 큰 시위로 발전했다.
15일에는 전남대뿐만 아니라 조선대와 광주교대 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여 도청 분수대 앞에는 1만 6천여 명의 학생과 수많은 시민들이 운집했다. 전남대의 시국성토선언문과 광주교대ㆍ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의 선언문이 낭독되었으며 교수들까지 참여했다.
학생들의 주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등으로 다른 지역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시위대는 집회를 마친 후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학교로 돌아왔다.
태극기 뒤에는 50여 명의 전남대ㆍ조선대 등 주요대학 교수들이 행진하고 그 뒤에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뒤따랐다. 경찰은 시위진압을 아예 포기하고 학생대표들에게 질서를 당부하는 형편이었으며 전날에 비해 시민들의 호응은 크게 늘어나 집회나 시위 도중에는 박수를 치거나 구호를 함께 외쳐 학생들을 격려했다. 이것 하나가 서울이나 여타 지역과 조금 다른 점이었다. (주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