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980년 8월 23일자 3면에는 어떤 기사가 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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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조선일보>가 한국 최대 신문사이지만, 이는 1980년대 이후의 이야기다. 1970년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지난 9월 26일 자유언론실천재단과 새언론포럼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한 '조선·동아 100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연회에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1970년대 이전 <동아일보>는 1등 신문이었다"면서 "<조선일보>는 2등 없는 3등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1등 <동아일보>와 2등 <조선일보>의 격차가 그만큼 컸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제치고 1등으로 올라선 것은 1980년 이후라고 한 교수는 말했다.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따라잡게 된 것은 그해 나온 <조선일보>의 어느 기사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기사는 1980년 8월 23일자 3면에 실렸다. 그런데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는 그 기사가 검색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과거의 모든 기사를 날짜별·지면별로 검색 가능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렇지만, 그날의 3면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조선일보> 1980년 8월 23일자 3면에는...
문제의 3면 기사는 '인간 전두환'이라 장문의 글이다.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분량이다. 기사는 전두환의 성장 과정, 육사 시절, 군 복무 시절에 더해 정권 장악 시점인 1979년과 1980년을 서술하면서 그의 인간 됨됨이와 리더십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기사의 첫 문장은 "여보 나 나갑니다"이다. 전두환이 아침마다 이순자한테 그렇게 인사하고 출근한다는 것이었다. "여느 남편들처럼 '다녀오겠다'는 여운이 깃든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짤막한 아침인사에서도 그의 사생관(死生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기사는 말했다.
기사는 전두환을 '사사로운 집안일에 신경쓰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는 지도자'로 그려내면서, 그가 1980년 5·18 광주항쟁을 전후한 시기에도 오로지 국민한테만 신경 썼음을 강조했다.
광주항쟁 직후인 그해 6월 1일, 중앙정보부장서리(직무대행)이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대대적으로 감축했다. 무려 300명이 넘는 인원을 '숙정' 형식으로 내보냈다. 이는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가 이끌었던 중앙정보부를 견제하는 한편, 전두환 자신이 이끌었던 또 다른 정보기관인 보안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중앙정보부 감축을 국민 신뢰를 얻기 위한 결단으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앙정보부장 서리 때 기구 개편에 따른 감원 문제가 제기됐을 때도 그랬다. 지시한 개편 지침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보부가 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보부가 될 수 있느냐'였다."
중앙정보부 인력이 감축된 1980년 6월 1일 당시의 국내 최고 이슈는 이른바 '광주 사태'였다. <조선일보> 기사는 이 사실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이 시기 전두환이 국민 신뢰를 염두에 두고 오로지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만 권력기관 개혁을 추진했다고 서술했다.
이 대목에서 '인간 전두환'은 전두환의 리더십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전 장군의 밑을 거쳐 간 부하 장교는 그의 통솔 방법을 3분의 1만 흉내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 내의 통설"이라면서 전두환은 지방색과 파벌을 가리지 않는 리더라고 칭송했다. 전라도 광주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그를 두고 '지방색'을 가리지 않는 지도자라고 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