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2.2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문 기사 (앞의 두 기념비) 경북고와 대구고 교정의 기념비
정만진
1946년 10월 대구시민 20만 명 중 1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현재로 환산하면 245만 중 12만 명이 '폭도'(<대구시사> 보도 내용)로 나선 것이다.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하면 10명 중 1명이 '폭도'였으니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결과는 선거 때 득표율로 나타났다. 1952년 첫 직선 대통령 선거 때 조봉암은 대구에서 23%를 득표했다. 조봉암이 전국 평균 11%(이승만 75%), 서울에서 10%, 전남(광주 포함)에서 9% 득표한 선거였다.
1956년 대선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대구 시민들은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이승만에게는 27%에 불과한 표를 던졌다. 당시 조봉암은 서울에서 37%, 전남에서 28% 득표했다. 전국 평균은 조봉암 30%, 이승만 70%였다.
조봉암에게 70% 투표했던 대구
대선 이후 정적 살해 |
3대 대선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1959년 7월 31일 사형시켰다.
7대 대선 이후인 1973년 8월 8일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대중은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동해에 수장될 위기에 직면했다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봉암이 죽음을 맞이한 것과 마찬가지 성격의 이 사건에 세계가 주목했고, 덕분에 김대중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
1963년 대선의 전국 득표율은 박정희 47%, 윤보선 45%였다. 대구는 박정희 51%, 윤보선 44%였다. 서울은 박정희 30%, 윤보선 65%였고, 전남은 박정희 57%, 윤보선 36%였다. 이때만 해도 이른바 '망국적 지역감정'에 따른 선거는 아니었다.
1963년 대선 때 7%에 지나지 않던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구 득표율 차이가 1967년 대선에서는 45%p로 돌변했다(전국 차이는 약 10.5%p). 1971년 대선 때도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구 차이는 40%p에 이르렀다(전국 차이는 약 7.9%p). 대구의 투표 성향 급변이 박정희 일파의 지역감정 조장 결과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대구의 돌변은 빅정희의 재선 때부터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낙선인'의 대구 득표율은 31.8%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 지난 1997년은 전혀 달랐다. 김대중 '당선인' 12.5%, 권영길 1.2%, 합계 13.7%에 불과했다.
2002년에는 노무현 '당선인' 18.7%, 권영길 3.3%, 합계 22.0%였다. 2017년 문재인 '당선인'은 21.8%를 득표했다. 1997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두 번 모두 1971년 김대중 '낙선인'의 31.8%에 견주면 차이가 컸다.
박정희 일파의 지역감정 조장 이래 시작된 '묻지마' 투표 행위는 3당 합당 이후 심화됐다. 1987년 대선 때 대구 지역 득표율은 노태우 70.7%, 김영삼 24.3%, 김대중 1.7%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합계 26.0%는 1971년 김대중의 31.8%보다 5.8%p 낮지만 2002년과 2017년 민주화 세력의 득표율에 비하면 4%p가량 높다. 1987년 김영삼 지지자 중 1/6 정도가 민주화 세력을 영원히 이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