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리스트 - 파국의 날>
새파란상상
현재 진형형인 일본 경제보복을 다룬 소설이 나왔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배제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준비 작업이 어떻게 진행돼 왔는가를 다루는 박철현의 <화이트리스트 - 파국의 날>이다.
소설은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격분한 일본 총리 야스베가 한국의 기를 꺾고자 2019년 3월부터 경제산업성을 움직여 화이트리스트 작업을 진행하다가, 6월 30일 김정운 북한 국무위원장과 조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예상을 깨고 판문점에서 전격 회동한 것에 격분해 경제보복을 느닷없이 발표하는 과정을 담담한 필치로 보여준다.
오사카 G20 정상회담을 공들여 준비한 자기의 노고를 생각지도 않고 G20이 끝나자마자 전 세계의 이목을 판문점으로 돌려버린 김정운과 트럼프. 특히 트럼프에게 야스베는 질투와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품는다.
하지만, 그런 심경을 트럼프한테 보여줄 수는 없다. 김정운한테도 마찬가지다. 만만한 쪽은 문재현 대통령뿐. 그래서 야스베는 은밀히 준비해왔던 경제보복을 이참에 터트려버린다. 2019년 하반기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일본 경제보복이 그렇게 나오게 됐노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은 경제산업성 무역관리관인 히라오 야쓰시다. 그는 총리 지시를 받고 화이트리스트 실무작업을 담당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야스베의 계획을 저지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야스베의 계획이 일본에 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히라오와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절감케 만드는 인물이 있다. 한국 집권당인 민주당의 외곽 조직, 도쿄민주포럼에서 사무국장을 하는 서건우다. 두 남자의 조합은 야스베의 계획이 엉뚱한 데서 차질을 빚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두 남자의 '케미'가 야스베의 계획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박철현 소설 <화이트리스트>는 담담하게 들려준다.
일본 내 한국인들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
소설가 박철현이 누구인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데뷔작이므로 소설가 박철현을 검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가 글을 써온 시간은 꽤 된다. 2001년 25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간 뒤인 2003년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써왔다. <경향신문>에도 '박철현의 일기일회'라는 연재물을 기고했다.
소설 표지의 안쪽 날개에 적힌 작가 프로필에 "무척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는 말이 적혀 있다. 지금은 인테리어업체 대표로 일하며 다섯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다. 미와코씨와 함께 네 자녀의 가정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글도 쓰고 사업도 하는 분주한 가운데, 현재진행형인 국제분쟁을 소설로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자 어느 정도는 모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소설보다는 신문 기사를 통해 호기심을 풀기 마련이다. 그래서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쉬운데도 그는 용감하게 소설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 시국에서 특별한 강점이 될 만한 요소를 이 책은 담고 있다.
일본 정권의 경제보복이 지금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자국 내에서조차 지지받기 어려운 이유를 소설은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스토리 자체는 실제 사실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일본 총리를 둘러싼 의사결정 구조를 집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현 정권에 대한 지지가 오래 가기 힘들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점은 이 소설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18년간이나 일본에 거주했다는 점도 강점이다. 일본 땅에서 일본인과 결혼해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꾸준히 글을 썼기 때문에, 한국 땅에서는 갖기 힘든 작가 특유의 관전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운명이 걸린 경제 한일전이 진행되는 지금, 작가와 유사한 입장에 놓인 일본 내 한국인들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를 이해하는 데도 소설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지금의 국면이 어느 누구의 승리도 아닌 공동의 승리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강력히 웅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의 차별성을 찾을 수 있다. 자칫 놓치기 쉬운 또 다른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 일본 일부러 나누고 그러지 마요"
이런 시각은 이 소설 '결단의 징조' 편에서 서건우의 딸 서유나가 아버지 친구인 히라오 무역관리관한테 던진 한마디에서도 드러난다. 유나의 한마디는, 자기 집을 방문한 히라오가 "넌 나중에 한국인 할 거야?"라고 물은 데 대한 답변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한국인이지만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또 본인이 현재 일본에 살고 있으니, 히라오는 유나가 어느 쪽 정체성을 더 좋아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던진 질문에 유나는 '되게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에이, 아저씨 되게 구식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한국, 일본 일부러 나누고 그러지 마요. 우리 반 애들 트와이스 앨범도 사고 킹앤프리도 좋아하고 그래요."
유나가 킹앤프리로 발음한 킹앤프린스(King & Prince)는 2015년 데뷔한 일본 남자 아이돌 그룹이다. 히라오가 어떤 실무작업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유나가 던진 한마디 '한국, 일본 일부러 나누고 그러지 마요'는 히라오에게 두고두고 생각거리가 된다. 이 한마디는 나중에 히라오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설에서 서건우의 딸 유나의 한마디가 갖는 비중은 서건우의 프로필이 작가 자신의 프로필과 유사하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자신과 비슷한 인물로 설정된 서건우와 그 가족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