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 이용시설인 '드림시티' 2층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는 이수정씨. 매주 화요일 오후 두시부터 한 시간 가량 이곳에서 연습을 한다며 기자에게 보러 오라고해서 갔다. 공연 일정을 말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 모습에서 노숙인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문세경
"'사랑이'를 제 목숨처럼 사랑했어요. 사랑이가 있어서 노숙 생활이 힘든 줄 모르고 견딜 때도 많았죠. 나는 못 먹어도 사랑이는 안 굶기고 꼭 먹였어요. 그런 사랑이가 임시주거지원을 받아 살던 집에서 죽었어요. 누가 밟았는지.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못해요. 그 아이를 잃고 많이 울었어요. 오랫동안 힘들었고요.
저는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었어요. 노래뿐만 아니라 달리기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어요. 성적표에 '팔방미인'이라고 쓰여 있던 게 기억나요. 통지표를 받아서 할머니께 보여드리니까 할머니가 통곡하시는 거예요. 저는 친엄마가 없거든요. 엄마 젖은커녕 분유도 못 먹고 컸어요. 저희 엄마는 미혼모였어요. 제가 백일도 안 되었을 때 먼 친척 할머니한테 맡겼대요. 그 시절에는 거의 엄마 젖을 먹고 크지만 엄마가 없으니까 젖을 못 먹었죠. 할머니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분유를 살 돈이 없었나 봐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제가 배고파서 우니까 할머니가 밥을 꼭꼭 씹어서 제 입에 넣어주시던 게.
할머니랑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중학교, 고등학교는 하숙을 했어요. 할머니가 힘이 없어서 밥해주기 힘드니까 하숙을 시킨 것 같아요. 하숙비는 엄마 친구분이 냈고요. 아마도 엄마가 하숙비를 몰래 주셨을 거예요. '미혼모'라는 단어는 커서 알았고, 버려졌다는 건 어렸을 때 눈치로 알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다 있는데 나는 왜 엄마 아빠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알게 된 거죠. 갑자기 알았으면 충격이 컸을 텐데 일찍부터 체감을 해서인지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대신 친구들한테는 자존심이 있으니까 부모님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어요."
진즉에 그녀가 거리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았고 합창 연습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공연도 보았다. 10년 동안이나 노숙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현재는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19살 때부터 종교 활동을 했어요. 25살에 영적 체험을 하고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신학교도 2년 정도 다니다가 중퇴했고. 유치원 때부터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어요. '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음악 자체를 좋아해요. 모든 음악은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힘든 노숙 생활을 하면서 노래가 없었다면, 합창단 활동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뎠을까 상상이 안 돼요. 제가 이만큼 자존감이 높아진 것도 합창단 활동을 해서일 거예요."
자신이 믿는 신을 말할 때와 합창단 활동을 얘기할 때 수정씨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일찍부터 부모님의 부재를 인정했다고 해도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시간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음악과 함께 버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수정씨도 사람이기에 힘들고 지친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자살 시도를 했어요. 나는 왜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을까 하면서. 그때가 사춘기 때니까 제일 심했죠. 약국에 가서 잠이 안 온다고 하면서 수면제를 샀어요. 여러 번 사서 모아 놨어요. 유서도 써 놓고 한꺼번에 먹고 잤는데 아침에 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약국 아저씨가 눈치를 챘나 봐요. 가짜 수면제를 줬대요. 하숙집 아줌마는 기적이라고 했어요. 자살에 실패하자 어린 마음에 둔갑술이 배우고 싶었어요. 요정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면 현실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했어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시간을 쪼개 부동산 중개소에서 집을 소개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요. 그 당시에 모은 돈이 8천만 원 정도 됐어요. 그걸로 내 가게를 하나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한 거죠."
이수정씨는 25살에 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남자였다. 서로 외로우니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아이 엄마가 자주 찾아왔다. 수정씨는 본인이 부모 없이 컸기 때문에 아이를 위해 본인이 남자와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8년의 동거 생활을 정리했다.
그 후부터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빨리 나의 가게를 차리고 싶어서다. 그 꿈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바람에 노숙의 길로 들어섰다. 노숙을 그만하고 싶어서 '쪽방'에 살기도 했지만 쪽방 트라우마가 너무 심했다. 차라리 노숙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거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노숙은 헤어 나오기 힘든 늪과 같아요. 혼자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노숙을 하면 자학도 많이 하고(울음). 자신을 괴롭히는 잠재의식 때문에 더 깊숙이 노숙의 길로 빠져들어요. 쪽방은 사람 하나 누우면 꽉 차는 공간이에요. 똥간보다 더 더러운 냄새가 나고 아무 때나 문 열어젖히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니까 마음대로 못 가고 월세는 비싸고. 돈이 없으니까 쪽방에 살 수밖에 없고, 선택의 폭이 좁으니까 서러웠어요. 저는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요. 제가 데리고 있던 유기견도 누가 밟아서 죽고. 피곤해서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서울시에서 임시 주거 지원을 두 달 정도 해줘요. 지원해 주는 돈에 맞춰서 집을 구하려면 정말 살 만한 집이 없어요. 지금 내 처지가 이러니까 감사히 생각하고 들어가면 되는데 트라우마가 너무 깊게 있어서 아무 곳에나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나이가 있으니 마음은 급한데 겁이 나서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방을 보러 다녀요."
그녀의 소박한 바람
수정씨는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닌다. 양손에는 여러 개의 비닐 가방이 들려 있다. 노숙을 하니까 짐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그 무거운 짐을 메고 비닐 가방을 들고 방을 구하러 다닌다.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하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그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을 찾고 있을 뿐이다.
10년 동안 노숙 생활을 하며 이러저러한 복지 서비스를 받았고 앞으로도 그 서비스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일하고 싶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납치당했을 때 폭행으로 다리를 다쳐서 잘 걷지 못한다. 장애진단을 받아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선정되면 좋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이수정씨처럼 '탈 노숙' 욕구가 있는 사람은 현재 복지 시스템이 만족스럽지 않다.
"노숙하는 사람들은 뭘 움켜쥐고 끌고 다니는 습관이 있어요. 이걸 '저장 강박증'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보상심리예요. 망한 인생을 짐을 끌고 다니면서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복지시설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이 더 친절했으면 좋겠어요. 서비스를 주더라도 이용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주었으면 좋겠어요.
노숙인 시설이면 노숙인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실무자들이 일 처리하기 쉽게 시스템을 만들어요. 불편한 점을 항의하면 무시하거나 오히려 불이익을 받아요. 규칙, 규율 만들 때 당사자들도 포함해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실무자들 위주로 그것들을 정하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소외감을 많이 느껴요. 저도 하루빨리 노숙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노숙을 끝내고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서 텃밭 있는 집에 살고 싶어요. 그게 저의 소박한 바람이에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출생의 비밀, 어린 시절의 애환, 고아처럼 혼자 살면서 겪은 모진 풍파들 등 이런 얘기는 정말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예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한테 신앙고백은 했지만 사람에게 이렇게 다 털어놓는 건 처음이에요. 내가 죄짓고 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거예요. 얘기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꺼내기 싫은 얘기, 즐겁지 않은 얘기, 살을 에는 아픔을 견디며 외롭게 살아온 얘기를 해준 이수정씨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다른 사람의 아픈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녀가 겪은 아픔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수정씨는 인터뷰가 끝나자 몹시 시장해 보였다. 인근의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식사 후에 어디로 갈 건지를 물었다.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 응급구호방이 있어요. 잠잘 곳이 없는 분들이 급히 이용하는 곳이라 잠만 자고 오전 7시가 되면 나가야 해요. 밤에는 오후 10시가 돼야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 8시 반이니까 못 들어가죠.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려고요."
무거운 그녀의 가방이 삶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총총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눌렀다. 십 미터쯤 갔을까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