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내려간 A가 새롭게 도전한 일은 바리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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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내려간 A가 새롭게 도전한 일은 바리스타였다. 일 년간 준비해서 1급 자격증을 땄다. 편집자에서 바리스타라니. 뚱딴지같은 변신이었지만 사실 그는 커피 마니아였다.
그가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인 건 2004년의 일이었다. 당시 직장이 있던 홍대 근처에서 처음으로 로스터리 커피를 마셨고, 그 이후로 카페를 찾아다니며 로스터리 커피에 대해 알아갔다. 언젠가는 꼭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1급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해도 바로 카페를 열 수는 없었다. 그만한 돈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대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되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확률이었다. 다행히 A가 다니던 바리스타 학원에서 한 카페를 소개해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페의 사장님은 30대였다. 자기를 써준 것만 해도 큰절을 하고 싶었다는 그였다.
"그야말로 제2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바닥 걸레질은 물론이고 화장실 청소도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죠. 하지만 나만 괜찮다고 괜찮은 게 아니더라고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직원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기가 불편했는지 자꾸 사장님이 청소를 하는 거예요. 나이가 문제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죠. 제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나이라는 사실에 좌절이 되더라고요. 정말 난감했어요."
그때 A가 선택한 방법은 '버티기'였다. 모든 사람이 보내는 눈치를 레이더로 전부 잡아내면 주눅이 들어 죽도 밥도 안 되는 법. 민폐 같은 불편한 시간을 견디니까 서로 편안해지는 시간이 왔고, 그다음에는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그 시간 사이사이에 위축이 될 만한 상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출발이 늦은 만큼 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했다. 그래서 로스팅 방법에 대해 선생님들을 쫓아 다니면서 배우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그는 작은 카페를 좋은 조건에 인수해서 운영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계속 적자가 났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체력적으로 부대꼈고, 경험 부족으로 결국 1년 만에 말아먹었다. 그 뒤로 다시 카페 매니저로 일했고, 지금 하고 있는 바리스타 강사가 자신에게 가장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A는 매 과정마다 배우기도 했고, 동시에 버티기도 했다. 당연했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으니까. 그는 버티는 시간이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버티는 게 비결이었다'는 말에 울컥했다. 나 역시 마흔에 방송작가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못하나 싶어서 스스로 위축되고, 나이는 무겁고, 그러다 결국 잘리기도 했다. 공백기를 거치며 방황하기도 했지만 49세인 지금까지 어찌어찌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으니, 버티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알고말고.
"나이가 주는 무거움도,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는 상황도, 뜻대로 안 풀리는 일도, 실패도 어차피 다 겪어야 하는 거라면, 잘 견뎌야겠다 싶었어요. 버텨야 하는데 용기가 없으면 무너지겠더라고요. 용기를 내려면 저한테 박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저한테 후해졌어요. 그러면서 좀 편안해진 것 같아요."
후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다.
"저에 대한 기대치를 낮춘 거죠. 저에 대한 제 기준은 늘 상위 1%였어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세상은 어쩌면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후하게 나를 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지금도 늘 마음에서 '넌 낙제야' 하는 악마의 소리와 '아냐, 너 그렇게 형편없지 않아' 하는 천사의 소리가 싸워요. 둘 다 들어보고 천사의 소리가 70점 쪽으로 가면 '그 정도면 괜찮아. 한번 해보자'고 해요. 그러다 의외로 80, 90점이 나올 수도 있고, 간신히 70점을 맞을 수도 있죠. '잘 되면 땡큐, 안 되면 말고'라는 정신을 배웠어요. 그걸로 좀 더 버텨보려고요. 전 이 일이 정말 좋거든요."
버티는 이들의 건투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