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 선생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 훈장과 훈장증김성숙 선생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 훈장과 훈장증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의 생전에 따뜻한 관심을 갖고 1964년 집을 지었을 때는 '피우정'이란 당호를 지었던 노산 이은상은 선생의 영전에 구름(雲)과 바위(巖)라는 아호를 소재로 하는 조사를 지었다. 뒷 부분을 소개한다.
하늘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물속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젖지 않고 간다.
산 위에 바위가 섰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거리에 바위가 섰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꿈쩍 않고 섰다. (주석 2)
운암 선생은 서거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유일한 명분은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체제의 확립과 행복된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이러한 대의명분하에서 일생을 바쳐왔고 아직도 이런 목적을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일기', 1964년 1월 27일자)
운암 김성숙은 70평생을 독립운동ㆍ혁명ㆍ전쟁ㆍ감옥 등으로 이어지는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19세에 가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잠시라도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살아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숨이 멈추고 그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자유당 시절 신익희가 찾아와 장관자리를 얘기했을 때 "야! 이놈아 너나 해라. 네놈이나 똥물 속에 계속 놀아라"고 핀잔하던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노 보살님이 그 말씀을 전해준다. (주석 3)
운암 선생이 서거한 1년 후인 1970년 4월 12일 동지ㆍ후학들이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묘 비 명
-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선생이시다.
- 1898년 평북 철산(鐵山)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개한 성격을 가졌더니 기미년에 옥고를 치룬 뒤 사회운동에 감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 중국 중산대(中山大) 정치학과를 마치고 북경, 광동, 상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혁명동지들을 규합,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 단체들을 임정으로 총 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맞으니 48세였다.
-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 없이 살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 지냈다.
1970년 4월 12일 노산 이은상(李殷相) 지음
주석
2> 『동아일보』, 1979년 4월 17일.
3> 목우, 앞의 책,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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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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