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판사가 최근 내놓은 책 <어떤 양형 이유>
김영사
"인사철마다 두 박스 가득 옮겨다니는 메모가 있다. 소년 재판 메모다. 내가 이 메모를 버리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의 비행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른들의 악행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중략)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어른들과 우리 사회의 악행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내 분노를 그 메모에 잘 재워두었다. 적어도 이 사건들에서만큼은 내가 증거다."
그리고 소년범 22명의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한다. 어릴 때 큰 아빠에게 성폭행당한 아이, 친구를 추행한 아빠에게 충격을 받은 아이, 갑자기 나타나 할머니 기초생활수급금을 가져가 버린 아빠 등 사연이 열 페이지에 걸쳐 소개된다. 아이들의 비행, 나이, 가명, 그리고 그들의 사연과 재판 결과 등 사실 관계만 짤막짤막하게 전하고 있기에 오히려 저자의 분노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슬픔 또한 짙게 나타난다. 저자는 "누군가의 천국이 공고해질수록 누군가의 삶은 지옥이 되어갈 때, 누군가의 삶은 지옥이 되어 가는데 누군가의 천국은 더욱 공고해질 때, 그런 결과에 부역해야 할 때" "나는 슬펐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책에 분노나 슬픔만 흐르는 건 아니다. <더 헌트>,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공각 기동대>, <스포트라이트>, <노트북> 등 저자가 자신의 양형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영화가 꽤 많이 등장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마무리투수가 9회말에 5점을 날려버려 역전패"를 하는 경우에 가끔 이성을 잃는다고 전하는 대목에 이르면 저자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 판사로 욕먹느니"
이렇게 책에서는 저자의 분노, 슬픔, 즐거움 등이 비교적 잘 읽힌다. 다만 '희(喜, 기쁨)'라는 감정은 잘 안 드러나는 편이다. 재판의 부실화를 초래하는 구조적 원인을 상술하며 "우리는 덫에 걸렸다"고 확언하는 대목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오늘도 5분 재판을 하며 자책감에 시달리는 많은 판사가 있다"면서 이렇게 적어나간다.
"우리는 덫에 걸렸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재판의 부실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덫이다. 물론 불신의 주된 책임은 법원에 있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으면 법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안타깝다."
판사는 재판을 한다. 그 재판을 두고 또 사람들은 판사를 '재판'한다. 그의 표현대로 "판사에 대한 다양한 욕을 졸이고 졸인다면", 그건 "결국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로 귀결된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라고 확언했다. "판사로 욕먹느니 재판공으로 칭찬 받고 싶다"는 그의 바람 또한 "정의의 원래 주인이자 이 글의 최종심인 독자들께 감사드린다"는 마지막 문장과 온전히 통한다.
책을 덮으면서 '판사 박주영'을 세상의 '재판정'에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이 책 전체가 저자 스스로 최종적으로 정리한 '(자신의)양형 이유'가 되는 셈이다.
어떤 양형 이유 - 책망과 옹호, 유죄와 무죄 사이에 서 있는 한 판사의 기록
박주영 (지은이),
김영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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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세상의 '법정'에 선 현직 판사... "내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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