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쯤 카메라에 담은 할아버지의 모습. 작업대 위에는 수십 년 세월을 할아버지와 함께한 낡은 연장통이 늘 놓여 있었다.
김숙귀
길 건너 이층 찻집으로 올라갔다. 창가 자리에서 강구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좋아 자주 들르던 곳이다. 그런데 찻집 이름도 주인도 바뀌었다. 물어보니 예전 주인은 이사를 갔다고 한다. 새주인이 얼음커피가 담긴 유리컵을 놓고 간다. 옛주인이 생각난다.
쟁반에 꽃잎을 새긴 뜨개받침까지 얹어 컵을 놓고 따로 작은쟁반에 보리건빵 한 봉지를 늘 같이 내왔었다. 작지만 따사로운 정은 이제 없다. 창밖으로 보이는 강구안 풍경까지 더해져 몹시 쓸쓸하고 허전하다.
찻집에서 나와 강구안 골목길을 걸으며 백석을 만나고 여전히 풀무질에 여념이 없는 성녕간 어르신의 모습을 보며 잠시 위안을 얻었지만,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은 종내 가시지 않았다.
섬진강은 통영만큼이나 아끼는 곳이다. 지난 봄, 벚꽃을 보러 하동에 들렀다가 같은 일을 겪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평사리공원에서 화개쪽으로 향하는 길의 벚나무터널이 빚어내는 풍경을 가장 좋아한다. 그날도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생각에 들떠 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길은 공사중이라 막혀 있고 아름드리 벚나무가 군데군데 잘려나가 있었다.
나는 공원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내 한쪽 팔이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날, 화개장터로 가는 길가에는 차선을 넓히기 위해 파놓은 붉은 흙들이 쌓여 있었고 구간구간 벚나무들도 잘려나간 채 쓰러져 있었다.
돌아나오는 길에 들른 십 년 단골 재첩국식당 주인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편함을 전혀 느낀 적이 없는데 벚꽃축제기간 고작 보름 동안 편하자고 그 아까운 벚나무를 잘라내다니...' 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도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가림막이 없는 바닷가에 걸터앉아 고만고만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강구안을 바라본다. 배 안에서 중년부부가 열심히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배가 먼 바다로 떠나기도 하고 조업을 나갔던 배가 돌아오기도 한다. 어부는 잡아온 고기를 배에서 내리고 기다리던 아내는 내린 고기를 함지박에 담아 종종 걸음으로 길건너 활어시장으로 간다.
내가 강구안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품고 함께 숨쉬는, 살아있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난 후에도 예전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강구안을 바라보며 통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데크길이랑 광장도 생겨 더 좋아질 거다'라던 찻집주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세상. 또 그것을 오롯이 발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내마음은 편치가 않다. 소중한 무언가가 시나브로 빠져나가는 것 같고 사라지는 옛것들이 그립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여행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과 객창감을 글로 풀어낼 때 나는 행복하다. 꽃잎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삽상한 가을바람 한 자락, 허리를 굽혀야 보이는 한 송이 들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날마다 꿈꾼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