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들판과 정태춘푸른 바람을 만나는 곳(평택시 오성면 신3리)에서 노래하는 정태춘
김해규
예수는 '세상에 불을 끄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잃어버린 야훼신앙을 되살리고 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의 시선을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게 했다. 정태춘이 그랬다. 음악의 길로 들어서고 기타를 잡고 노래를 시작한 이래 그는 자신과 싸우고 시대와 불화하며 푯대를 향해 나아갔다.
정태춘의 고향마을 후배로 시인 박후기가 있다. 박후기의 초기 시(詩)에는 청소년기의 방황, 그 속에서 봤던 미군기지와 미군기지촌 그리고 고향 도두리가 있다. 정태춘도 그랬다. 그는 20대 초반 지독히도 방황했다. 고향 집 사랑방은 방황의 아지트였다. 한 뼘밖에 안 되는 골방에 처박혀 친구들과 삶과 인생을 이야기했고 때론 떠돌며 혹독한 세상을 체험했다. 그렇게 체득된 삶이 1979년 초에 발매된 1집 앨범에 고스란히 담겼다.
올해는 그가 1집 앨범을 발매한 지 만 40년이 되는 해이다. '시인의 마을', '촛불'로 대별되는 1집 앨범은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명반이다.
필자도 고등학교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태춘의 노래에 깊이 빠졌다. 필자가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정태춘은 박은옥과 결혼하고 함께 2, 3집 음반을 냈지만 나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전역 후에는 대학가를 풍미한 운동가요에 묻혀 살았다.
그러다가 친구 집에서 '떠나가는 배'와 '봉숭아'를 접하고는 "역시 정태춘이지!"라고 무릎을 쳤다. 박은옥이 청아한 음색으로 부른 봉숭아는 절창이었다. 그것은 내 어릴 적 고향 정서와 함께 클로즈업되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음반으로만 만났던 정태춘을 다시 만난 건 1980년대 후반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다. 그는 더 이상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을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서정성만 자극하는 염세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노래는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87년 6월 항쟁 뒤에는 가요 사전 심의 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아직도 내 주요 소장품 가운데 하나인 '19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당시 발매된 불법음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한 평택은 정태춘의 고향이었다. 사실 오랫동안 그걸 모르고 살았다. 2000년대 초반 지역신문 기자를 하던 후배가 정태춘씨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가 고향 도두리를 방문해서 촬영을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났다. 함께 밥을 먹고 그의 친구들과 KBS <여섯 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인연으로 대추리 미군기지반대투쟁에 동참했다. 정태춘이 주도한 '들 사람들'이라는 문화예술인 연대에도 이름을 걸었다. 하지만 교사라는 부자유스런 직업을 핑계 삼아 처절하게 싸우지는 못했다. 그게 오랫동안 짐이 되고 부채로 남았다.
정태춘은 결코 패배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