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전 산업자원부 장관
참여사회
지난 2018년 10월, 일제 강제동원 청구권 소송 대법원 판결에서 촉발된 한일갈등은 8월 7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국가에서 배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에 한국 시민들은 대규모 일본 불매운동을 일으켰고,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한일갈등은 장기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있어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 그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일찍이 '65년체제'의 맹점을 지적하며 한말의 제조약의 불법·무효화를 주장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원로경제학자이자 한일시민사회 전문가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누구보다 앞장서서 한일 시민연대의 길을 터온 그를 8월 16일,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참여사회와 만남이 있기 바로 전까지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 참석차 내한한 일본 시민사회 대표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이번 일본의 조처를 가리켜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대해 보상은커녕 경제적 처벌을 한 것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단호히 말하면서도 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 시민사회가 함께 연대할 것을 주문했다. 다음은 한일관계의 해법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일 시민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8.15 74주년,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 규탄 정의평화실현을 위한 범국민 촛불 문화제'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일본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발언도 있었는데, 어떻게 지켜보셨습니까.
"어젯밤 나는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서 일본 시민운동의 지도자 다카다 겐씨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스피치를 들으면서 한일 시민연대가 싹이 돋는 맹아기를 지나 조금씩 태동기로 접어드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한일 시민연대가 잘 이뤄진다면 아시아의 새로운 희망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러한 움직임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상당히 고민하고 또 염려하면서 지켜봤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그런 '희망'을 엿보셨는지요.
"얼마 전 서울시 중구청이 '노재팬(No Japan)'이라는 플랜카드를 중구의 거리 곳곳에 내걸었는데, 우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요청과 움직임에 의해 (그 플랜카드가) 내려진 것이 내게는 일종의 시그널로 다가왔어요. 아베 정권과 일본 시민을 분리하여 유연하게 가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지요. 그래서 어쩌면 한일위기의 제1라운드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보았습니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빼면서도 구체적인 제재사항은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과 한국 시민사회가 자연스럽게 '노재팬'과 '노아베'를 구분하려는 움직임이 거의 동시에 포착되면서 한일관계가 강대강에서 갈등관리 형태로 접어드는 듯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일시민사회 플랫폼이 서서히 구축되어 가는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 교수님께서는 한일지식인회의 공동대표를 맡으시는 등 그동안 한일 시민사회의 가교 역할을 해오셨는데요, 말씀하신 '한일시민사회 플랫폼'의 구상과 필요성은 언제 처음 느끼셨나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내가 일본 동경대 교수로 있었어요. 당시 월드컵을 앞두고 동경에서 한일 평가전이 열렸는데 한국이 이겼어요. 이긴 선수들과 한국 응원단 한 2000명이 동경의 긴자 거리를 '이겼다!'고 외치면서 달리는데 그걸 지켜보던 동경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어요. 그로부터 한 달 후 서울에서 또 한일 경기가 열렸는데 그때는 일본 팀이 이겼고 명동 거리를 달리는 일본 응원단과 선수단을 향해 이번엔 서울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어요. 그걸 보면서 한일 시민사회가 참 성숙했구나, '시민적 한일관계'가 수립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때 한일 시민들의 성숙도를 목격한 이후로 나는 '65년 체제를 2002년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당시 '2002년 체제'라는 말이 회자됐고, 일본 NHK 방송사에서는 '1965년 체제에서 2002년체제로의 이행'이라는 테마로 특집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65년 체제에서 2002년 체제로 전환의 핵심은 '시민 없는 한일관계'에서 '시민 중심 한일관계'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한일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로 발전하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던 듯해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 2002년이 끝나고 난 후에 한일 시민사회의 교류와 연대는 굴곡을 겪었죠."
- 교수님께서는 일찍이 2010년 강제병합 100년 즈음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주도하셨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시민사회공동평화선언>도 이끌어내셨는데요,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지금 한일문제의 핵심은 65년체제에 있고, 65년체제의 핵심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2010년 강제병합 100년 즈음해서 을사보호조약과 한일병합조약 등 한말 제조약의 불법·무효화 투쟁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와다 하루키 교수와 중심이 되어 한일지식인 100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했어요. 당시 내가 안중근에 대한 논문을 쓰고 나서 안중근의 인품과 사상에 감동을 받아 일본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어요. '한말 제조약이 전부 엉터리들인데, 그것 무효 공동성명을 냅시다.' 그렇게 일본 측의 호응을 받아 시작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500명, 일본에서 500명 서명을 받았죠.
한국에서 500명이 서명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500명 이상 서명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런데 500명이 넘어섰을 때는 그야말로 눈물을 흘렸지요. 그렇게 어렵게 만든 성명서를 가지고 당시 일본의 중진 국회의원들 사무실을 찾아다녔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 '간 나오토 총리 담화'가 나올 수 있었죠.
올해는 광화문에서 3.1독립운동 100주년 한일시민사회공동평화선언을 했어요. 일본 강제징용 문제에서 가장 앞장서고 있는 우치다 마사도시 변호사를 모셨는데 안타깝게도 한국 시민사회에서 별로 반응이 없었어요. 그리고 지난 6월 7일과 8일에는 동경에서 1500명의 동경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과 사이좋게 지내자, 아베는 반성하라, 일본은 가해자임을 잊지 말자' 등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한국 언론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한일 시민연대가 아직 먼 얘긴가 하고 실망했는데, 금년 후반기에 와서야 한일 시민연대가 태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껴요."
"일본 반아베 세력 돕는 일, 한국 촛불의 사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