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 우재룡' 표지
이성우
제6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1910년대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단체는 대한광복회'라는 대목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면서 '대한광복회가 전개한 의협 투쟁은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기술했다.
1915년 중순부터 1918년 초반까지 약 3년 동안 맹활약을 펼쳤던 광복회는 성격상 구한말 의병의 후신이자 1920년대 의열단의 전신이었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고, 의연금 모금에 협조하지 않은 장승원 등 친일 부호들을 처단했으며, 세금 수송 차량을 탈취하고 그들의 중석광과 헌병 초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 최고의 무장 항일운동 결사체
그 무렵은 나라가 망한 직후였기에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강점기 초기인 탓에 일제의 무단 통치도 그 어느 때보다 극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회는 나라 안의 각 도는 물론 만주에까지 지부를 설치하는 등 전국 조직을 갖추고 활동했다. 2대 만주 지부장이 김좌진이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었고, 지휘장으로는 우재룡과 권영만이 활동했다.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전라도 지부장 이병찬, 평안도 지부장 조현균, 강원도 지부장 김동호 등의 도 단위 지휘자들과 사무총괄 이복우 등이 핵심이었다. 중국과 국내 독립운동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단둥 안동여관 운영은 손일민이 맡았다.
의병 출신들이 앞장서서 의혈 투쟁 선도
선비 출신이 많았지만 우재룡, 권영만 등 의병 활동을 해온 인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구성원이 다양했던 만큼 광복회는 나라를 되찾아 임금을 본래 대로 옹립해야 한다는 복벽주의자들과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공화주의자들로 혼합되어 있었다. 우재룡 등 의병 출신들은 전투 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광복회의 의협 투쟁을 선도했다.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식을 마친 광복회가 처음으로 전개한 활동은 경주 효현교에서 세금 수송 차량을 공격한 거사였다. 그해 12월 24일 우재룡과 권영만은 무열왕릉 서편 솟티고개를 넘어 법흥왕릉 아래 고현천으로 나아가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현 시세 약 4억원)을 탈취했다.
광복회의 7대 강령 중 첫 번째가 '우리는 무력을 준비한다. 일반 부호의 의연과 일본인이 불법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이로써 무장을 준비한다'였으니 강령에 충실한 활동을 펼쳤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