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가게 안의 진열 상품
황인규
폴란드 왕이자 작센의 제후 아우구스트 1세는 '이마리'라고 하는 일본 자기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가키에몬 도자기에 반해 미친 듯이 사 모았다. 수집 욕구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자기 생산에 도전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사 뵈트거를 드레스덴의 성 안에 연금시킨 후 자기 개발을 명령했다. 뵈트너는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자신이 살아서 나가는 길은 도자기 제작에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뵈트너는 실험에 몰두했다. 8년의 연구 끝에 1710년 드디어 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작센과 보헤미아 경계의 산에서 태토(백토)를 찾아낸 것이다. 인공 코발트블루가 개발되기까진 앞으로도 백년 가량 더 세월이 흘러야 했지만 백색 자기가 탄생한 것만 해도 경이로운 성과였다.
아우구스트 1세는 마이센(Meissen)에 공장을 세우고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술 유출을 꺼린 아우구스트 1세는 뵈트너를 풀어주긴 하되 완전한 자유를 주지 않았다. 작센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고 이제 금을 만들어 보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ㅡ아우구스토 1세도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뵈트너를 평생 가둬놓고 싶었던 것이다ㅡ지독히도 운이 없는 사내 뵈트너는 5년 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온갖 실험으로 화학약품에 중독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마이센 자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자기 생산 노하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유출돼 불과 이십년도 안 돼 오스트리아, 스웨덴, 헝가리 등지에서 공장이 세워졌다. 수송비 부담이 없는 유럽산 자기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기술발전까지 이루어냈다. 동시에 디자인을 선도하면서 금세 유럽시장을 장악했다. 영국도 그들만의 비법으로 본차이나를 개발해 도자기 시장을 석권했다.
17세기 초 '화이트 골드'라고까지 불리던 중국 자기는 18세기 중반에 들어와 유럽산 자기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 갔다. 한때는 신기하고 신비로웠던 중국풍 그림도 식상해졌다. 무엇보다 유럽 사람들의 기본적 미감인 화려한 장식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유럽에선 로코코와 아르누보 양식의 화려한 장식문화가 꽃피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유럽산 자기를 더 선호했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산 못지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 더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취향 선호를 뜻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문화를 이끌었던 델프트 블루도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태토가 부족한 네덜란드 환경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자기 문화를 이끌어갈 말 그대로의 토양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델프트 블루는 1620년경부터 1720년경까지 100년 동안의 전성기를 우울하게 마감하고 지금은 과거의 향수만을 파는 몇몇 기념품 가게로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델프트 블루의 자존심이 아직까지 죽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델프트 타일'이다. 델프트는 자기에 그치지 않고 소성(塑性) 기술을 타일에도 적용했다. 타일은 엄청나게 성공하여 '델프트 타일'이라는 브랜드로 전 유럽에 공급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은 델프트 타일에 열광해 온 나라의 성당과 기념비적 건물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거의 비슷비슷해서 문화적 맥락에서 별 차이를 못 느낀다. 단 한 가지를 빼고. 그 한 가지가 타일 문화다. 스페인의 타일은 과거 무어인이 지배하던 시절에서부터 전승된 이슬람 양식의 타일이 주류다.
그 옛날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슬람 타일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세련되게 구사하고 다양한 색감으로 풍부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를 계승한 '세비아 타일'과 '발렌시아 타일' 역시 화려한 색깔을 뽐내며 정교하고 세밀한 문양을 구현하면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타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스페인 타일은 폴리크롬 타입으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데 반해 포르투갈은 모노크롬 타입으로 우아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전자가 젊고 발랄하다면 후자는 정숙하고 기품있다. 스페인의 타일 벽화가 화려한 채색과 정밀한 묘사로 화면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면 단조로운 모노톤으로 구성된 포르투갈의 타일 벽화는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서 의미를 되새기며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벽장식용 타일을 아슐레호(azulejo: 영어식으로 아줄레조)라고 한다. 이 아슐레호가 델프트 타일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에 델프트 타일이 유행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17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 가브리엘 델 바르코(Gabriel del Barco)가 리스본에 타일 공장을 세우면서 홀란드 사람 빌럼 반 드 클로엣(Willem van de Kloet)와 얀 판 오르트(Jan van Oort)를 초빙한다. 바르코는 스페인 타일의 식상함을 극복하고자 나름대로 신상품을 들여온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오르트와 클로엣은 이전보다 큰 패널에 흰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그린 타일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타일에 이내 마음이 뺏겼다. 델프트 스타일로 장식한 '마르퀘스 드 프런티어 궁'과 '하느님 어머니 수녀원(Convento de Madre de Deus)'의 타일 벽화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 유행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델프트 타일은 순식간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갖 건물을 치장했다. 리스본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없어서 홀란드에서 수입했다.
1698년 국왕 페드로 2세는 델프트 타일 수입이 지나치다면서 수입금지 조처를 취했다. 갈수록 수입이 힘들어지자 바르코는 공장을 넘기고 스페인으로 떠난다. 이후 델프트 타일은 포르투갈 자체에서 공급되었고, 아슐레호라고 불리며 자체의 고유한 양식과 문양으로 발전한다.
멀리서 보면 파르스름한 포르투갈의 성당들은 예외 없이 아슐레호로 장식한 것이다. 각종 역사화와 성서화가 델프트 양식의 타일로 붙여졌다. 이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포르투갈만의 특이한 풍광이다. 애초 델프트 자기가 포르투갈 상선의 납치로부터 시작했는데 델프트 타일이 포르투갈 건물의 최고 애용품이 되었으니 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