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서 세 여자, 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한겨레출판
조선희는 한 장의 사진에서 이 소설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주세죽과 박헌영의 딸 비비안나 박이 1991년 한국에 왔을 때 그녀 손에 들려 있던 사진이다.
사진엔 밝은 표정으로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세 여자가 보인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다. 세 여자의 표정에선 일본의 압제와 가부장제의 억압에 의한 고통이 읽히지 않는다. 도리어 여유롭고 남들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조선희는 사진 속 세 여자의 표정을 보며 그녀들은 분명 그 순간 희망에 차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새로 받아들인 사상과 뜨거운 젊음이 미래를 희망하게 한 것일까.
이 사진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세 여자의 단발머리. 당시 조선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싹둑 자른다는 의미는 "나, 독립된 인격체요"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여성은 철저히 객체로만 머물러야 했던 시대에, 그녀들은 머리를 자름으로써 스스로를 주체로 내세운 것이다.
조선인들의 눈에 신여성이란 존재는 이해불가였다. 노골적으로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도 많았고, 신여성의 사생활을 소비하는 데 재미 들린 시선 또한 많았다. 실제로 정숙의 남성 편력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녀의 지금 남편이 세 번째인지, 다섯 번째인지 수군대는 소리가 정숙 귀에까지 들렸다.
책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엔 세 여자의 연애사와 그 연애가 불러온 숙덕거림에 관해 상세히 기록됐는데, 잡지 <삼천리>엔 정숙이 아버지의 성이 다른 둘째 아이를 낳았다는 거짓 기사까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 세 여자는 여성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주목받았다. 가뜩이나 유명한 여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청계천에서 시간을 유유히 흘려보내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화제였겠는가. 이를 두고 또 얼마나 많은 비아냥과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겠는가. 하지만 남들이 쑥덕거리든 말든, 신여성 세 여자는 머리를 싹둑 자른 결기로 그녀들의 삶을 조국 독립에 투신한다. 독립된 인격체로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두려워서 숨는 대신, 두려워도 나선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는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여성 혁명가의 시선,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의 시선. 언젠가 봤던 프랑스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에서 오십 대 중반에서 육십 대 초반 정도의 교수는 식탁에서 자식들로부터 놀림을 받는다. "엄마, 예전에 사회주의자였잖아." 그러자 그녀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어, 그게 좋은 줄 알았거든."
1920년에 상해로 몰려든 조선 젊은이들도 그랬다. 그게 좋은 줄 알았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역사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흥망성쇠를 다 알지만, 소설 속에서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겐 공산주의가 현재이자 미래였고,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인간 해방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좁고 위험하지만 그 길의 끝엔 필시 모든 계급의 평등하고도 행복한 삶이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지금을 사는 우리가 우리의 신념과 이상을 따라 매일을 살아내듯, 그렇게 공산주의자의 신념과 이상을 품고 매일을 살아냈다. 그들이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명료했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젊은 혁명가들의 일상은 혁명 속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저자가 당시의 시대상과 상상력을 잘 버무려 만든 흥미로운 장면도 있다. 박헌영과 주세죽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여운형은 이제 곧 부부가 될 두 사람에게 앞으로도 서로 사랑하겠느냐 묻는 동시에 조국 독립과 무산자 계급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는지도 함께 묻는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독일어판 <자본론>에 손을 얹고 "네" 하고 대답한다.
축가는 사회주의 민중가요인 <인터내셔널가>다. 당시엔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집회에서든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 장면을 읽으며 그 시절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겐 사랑보다도, 가정보다도, 혁명이 먼저였던 것이다. 사랑도, 가정도, 혁명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세 여자와 세 여자의 남편이자 애인은 모두 공산주의자였고, 조선에서 공산주의가 부침을 겪을 때마다, 그들의 삶도 격랑에 휩싸였다. 이제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미래를 희망하던 시간은 지나갔다.
1925년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공표하며 공산주의자들을 굴비 엮듯 감옥으로 엮어 들어갔다. 세 여자도 차례대로 체포됐다. 이후 형무소에서 풀려난 세죽은 남편 헌영을 옥바라지한 끝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로 건너갔고, 정숙은 반복된 형무소 생활을 뒤로하고 무장 투쟁을 위해 새 남편과 중국 남경으로 떠났으며, 명자는 애인 단야와의 짧은 모스크바 생활 후 모진 고문 끝에 원치 않은 전향을 했다.
공산주의가 소멸하거나 변질되면서 그녀들의 삶도 함께 꺼졌다. 그녀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테러당하거나 숙청당하거나 총살당했고, 그녀들의 삶이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았다. 세죽과 명자의 후반생은 가슴 아릴 정도로 처참하고 고단했다. 고립됐고, 불행했고, 배고팠고, 외로웠다. 세 여자의 말년은 서로 접점 없이 끝났다. 정숙은 해방 후 사상의 고향 북을 택해 그곳에서 장수했고, 세죽은 시베리아 유형 생활 끝에 외롭게 죽었으며, 명자는 전향 후 스산한 삶을 살다가 혼자 죽었다.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세 여자는 독립 운동가가 됐다. 이후 그녀들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일에 온 삶을 바쳤다. 그녀들은 조국을 위해 소중한 것들에게서 자주 등을 돌려야 했다. 평범한 일상도, 꼬물거리는 자식도, 고향에 두고 온 부모도.
그래서 힘겨운 삶이었지만, 때론 자신들의 한 많은 인생을 생각하며 가슴 치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지난 선택들을 후회하진 않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 겪은 모든 행복과 불행은 그녀들이 한 선택의 결과였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지도 몰랐다. 세죽은 언젠가 말했다.
"그동안 땅 밑이 꺼지는 것처럼 힘들 때도 많았고 죽고 싶은 적도 있었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바깥이 춥다고 껍질 속으로 도로 들어가겠니? 죽도 밥도 아닌 그런 인생은 생각도 하기 싫어."
배재어린이공원에 서 있던 날, 나는 며칠 전에 읽은 소설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독립을 위해 했던 모든 일들, 그 일들을 하는 과정 중에 겪은 모든 고초들, 그녀들의 화끈하거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들, 그리고 그녀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했을 법한 생각들이 여전히 내 일상과 함께였다. 소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소설을 읽고 어딘가를 찾아올 정도로 벗어나지 못한 적은 별로 없었다.
벗어나지 못하는 이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돼도 좋을 것 같았다. 알아야 했지만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이제라도 긴 시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그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같아서였다.
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한겨레출판, 2017
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한겨레출판, 2017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공유하기
결혼따위 뭔 소용이람? 댕기머리 끊어낸 조선 여성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