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군혜 여사두군혜 여사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중한문화협회와 한국구제총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배경의 하나로 아내 두군혜의 역할을 들었다.
"(두군혜는) 등영초(鄧潁超)라고 주은래 마누라 하고도 굉장히 가깝고 서로 친해온 그렇게 되니까 이러저러 해서 곽말약하고 서로 친하게 되고, …그런 관계로 해서 차차 주은래하고 알게 돼서 동필무(董必武)를 알게 되고 그랬지요." (주석 8)
김성숙은 자신과 아내의 인연을 맺게해 준 등영초를 통해 그의 남편 주은래를 알게 되고, 다시 중국공산당의 핵심인 동필무까지 소개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정이지만, 해방 후 이승만 아닌 김구나 여운형이 집권하고, 김성숙이 정부 요직에 있었다면 중국공산당 정부의 주은래ㆍ동필무 등 핵심 인사들과 관계가 유지되고, 한반도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중한문화협회ㆍ한국구제총회 등을 매개로 한 한ㆍ중연대활동 과정에서는 광저우(광주) 중산대학 출신의 학력,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 활동의 중심인물로서 중국정부 요로와 맺은 인간관계, 조선민족전선 및 조선의용대통신 간행을 매개로 쌓인 중국 측 인사들과의 지면, 사회과학과 국제정치에 정통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교양 등이 그의 입장과 위상을 뒷받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한ㆍ중연대활동 과정에서는 아내 두쥔훼이(두군혜)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주석 9)
앞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두군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3년 1월 23일 충찡에서 한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될 때 두군혜는 중앙집행위원 9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임될 만큼 한국독립운동에 열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