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광복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왼쪽부터).
나남
김성숙의 임시정부시절 관련 기록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환국 후 이정식 교수와 대담에서도 이 부분은 소략되었다. 연관 기록중에는,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이 되었던 김준엽(전 고려대학 총장)의 기록이 있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광복군이 되고 충칭에서 틈나는대로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찾아뵙고 지도를 받으려고 했다. 그리고 김구 주석을 비롯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하여 '강좌'를 들었다. 김준엽이 만났던 김성숙의 단면이다.
나는 우선 정당대표로서 '강좌'에서 빠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선생을 찾았다. 꼬불꼬불한 중경의 언덕 뒷골목에 있는 그의 거처를 간신히 찾아갔더니 다행히도 그는 집에 있었다.
'해방동맹'이라고 해야 김성숙 선생과 박건웅 씨 둘이서 이끄는 정당이었다. 박건웅 씨도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높은 언덕 위의 조그마한 죽제가옥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경에서의 소문은 그들이 진짜 '빨갱이' 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원봉보다 훨씬 좌경했다는 뜻이다.
숨을 헐떡이며 집을 찾으니 김성숙 선생은 천만 뜻밖의 방문으로 여기면서 여간 놀라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49세(1896~1969, 호는 雲岩) 였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넓은 대머리가 되어 나이보다는 훨씬 늙어 보였다.
"날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데 나를 찾아와도 김 동지는 괜찮겠소?"
"저는 왜적과 싸워온 선배님들은 모두 존경합니다. 그리고 싸우는 방략이나 앞으로 건국이 되면 우리 민족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 방도에 대해서도 선배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첫 번 대화였다. 그는 나의 태도를 흐뭇하게 생각하였는지 손수 차를 끓여서 대접하는 것이었다.
"내가 진짜 빨갱이라면 왜 중경에 남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있겠어요? 나도 연안에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어요."
그는 강력히 자기는 지금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가 겪어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일생도 형극의 길이었고, 또한 공산주의자라는 평을 받을만한 대목도 있었다. (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