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서명 없는 카피)」도쿄 도고세이지기념손보재팬미술관
도쿄 도고세이지기념손보재팬미술관
고흐의 사후에 가장 이르게 판매된 그림들은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1987년 3월 30일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 고흐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의 카피가 출품되었다. 경매 호가가 시작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2508만7500파운드(3992만1750달러)라는 거액에 낙찰된다. 고흐의 편지에서 언급된 바가 없고, 그 외에 기록이 없는 이 그림에 대해 위작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이 그림이 시장에 나온다면 당시 낙찰 가격의 몇 배 이상이 될 것이라 추정된다.
"천재성의 조건은 언제, 어디서나 같음보다 다름에 있다"(이광래, <미술철학사1>145)고 했다. 이것이 고흐를 특정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일과 동질은 본래 권력 지향적 잠재력과 환원주의적 권력 의지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동일은 차이와 자연히 거리 두기나 낯설게 하기를 하려 한다. 즉 같음은 다름과의 차별을 위한 것이다"(같은 책, 146)라고 설명하고 있는 바, 이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미술계에서 받았던 냉대와 조롱의 이유, 더불어 고흐가 받았던 철저한 무관심에 대한 이유를 추정하게 한다.
고흐의 회화들은 이전의 어떤 회화 전통과도 유사하지 않은 독특한 것들이었다. 소재와 기법, 구성, 색채에서 모두 독특하였다. 특히 그의 해바라기 그림들은 그 이전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고흐 자신만의 독창적 작품이었다.
고갱도 해바라기를 따라 그리다
'타히티의 화가' 고갱과의 관계에서 해바라기 그림은 상징적인 연결고리이다. 고갱이 파리의 샬레 식당의 비공식 전시회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2점과 자신의 그림을 교환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었다.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을 남부 지방의 공동 아틀리에로 쓰고자 하여 고갱을 초대한다. 1888년 7월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들이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고흐의 동생이자 그의 그림을 팔아주는 화상인 테오의 압력 때문에 고흐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지만, 망설였던 것이 분명하다.
8월 21일 즈음 고갱에게서 '남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노란 집을 장식할 해바라기 연작을 고흐가 그리기 시작한다. 고흐는 고갱과의 협업을 엄청나게 기대했다. 그가 오는 것에 대비해 실내 장식과 가구에 큰돈을 들였다. 그리고 그의 침실을 청록색 배경의 <해바라기 열네 송이>와 노란색 배경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로 장식하려 하였다.
1888년 10월 23일 새벽 이전에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다. 당시 고갱은 마흔 살 즈음이었고, 고흐는 그보다 다섯 살 어렸다. 고갱과 고흐의 잦은 다툼은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에 파국을 맞는다. 고갱이 화를 내며 나갔고, 밤새 노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고, 이를 유곽의 여성에게 전해주는 이상 행동을 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고흐는 1889년 1월에 고갱이 편지에서 요청한 해바라기 그림의 카피를 그릴 것을 결심한다. 고갱은 편지에서 "자네의 노란색 배경의 해바라기는 내가 '반 고흐 스타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완벽한 한 예로 간주한다"(마틴 베일리 110쪽에서 재인용)고 썼고, 이런 언급에 대해 고흐는 어느 정도 마음을 풀고 카피를 그리려 결정한다. 그래서 고갱이 원하는 바대로 <해바라기 열네 송이>와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의 카피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