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분도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의 표지. 최분도 신부가 아이들을 안고 있다.
오문수
필자가 학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미국은 언제나 고마운 나라로 알고 있었다. 6.25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미군이 목숨을 바쳤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해준 나라였다.
6.25 전쟁 직후 태어난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은 미국에서 보내준 강냉이죽을 배급받아 먹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계정세를 공부하면서부터는 미국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5.18광주항쟁 당시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을 보며 미국에 대한 평가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분도 신부의 일대기를 다 읽고 난 순간 "천사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오늘의 미국이 있는 건 바로 "최분도 신부님 같은 천사가 계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외되고 어려운 한국인들을 사랑한 최분도 신부
최분도(Benedict A. Zweber M. M)신부는 1932년 1월 7일 미국 미네소타 주 뉴우마켓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노벨 즈웨버와 어머니 에블린 즈웨버의 10남매(5남 5녀) 중 다섯 째(3남)으로 태어났다.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는 최분도 신부님이 1959년 6월 13일 27세로 사제서품된 그해 10월 대한민국에 선교사로 입국한 후 1990년 2월 초 미국으로 소환되어 미국과 러시아에서 선교활동 중 척수골수암으로 돌아가시기까지의 삶의 기록이다. 그가 한국 선교사 파견을 간청한 이유가 있었다.
군인으로 대한민국에 왔던 둘째 형 '메달도'씨가 제대 후 한국을 못 잊어 다시 왔다가 광나루에서 급류에 휘말린 어린이 두 명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것. 형의 장한 삶에 감동을 받아 한국선교사 파견을 자원했다. 한국에 온 그가 맨 처음 그가 부임한 곳은 연평도였다.
이역만리 한국에 온 그가 가장 먼저 부닥친 어려움은 언어와 식생활이었다. 특히 고추, 마늘, 젓갈이 질색인 그는 도시에서보다 더 짜고 매운 음식에 기가 질렸다. 그래도 그 음식을 군말없이 먹고, 혀를 갉아내는 듯한 매운 통증과 배앓이, 설사와 호된 진통을 참았다.
낯설고 물설고 말과 생활이 다른 선교지, 문화 시설이란 한 가지도 없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섬,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답답한 현실에 믿을 곳은 오직 주님뿐이다. 그가 밤새워 묵상 기도한 내용을 보면 그가 절실하게 하고픈 내용이 들어있다.
"하느님 아버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부터 착수해야 합니까? 전등, 병원, 상수도, 가난…모두 급한 일입니다. 동족끼리 전쟁을 한 대한민국 가난한 이들이 이곳 주민입니다. 마음이 아파요. 어렵고 헐벗고 사는 게…. 게다가 아픈 이들이 많아요. 병원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것도 급하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에 병원을 세우고 아픈 사람 낫게 해서 마음의 아픔도 치료해 주고 싶어요"
그는 주민 후원방법으로 미국의 월간지에 이곳 사정을 알리고 후원자 모집광고를 냈다. 미국 각지에서 후원금이 답지하자 6.25때 참전했던 쾌속정을 2천 달러에 구입해 '바다의 별'이란 병원선으로 개조해 아픈 사람들을 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