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승욱 선생 (1917~1973)권승욱
권한솔
필자는 2013년 1월 15일에 자료를 제출하여 국가보훈처에 권승욱에 대한 독립유공 공훈심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해 광복절 이전에 포상이 어렵다는 통지를 받았다. 필자는 다시 증빙 서류를 제출하여 2013년 10월 21일에 재심을 요구했다.
다음 해인 2014년 광복절 이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포상이 어렵다는 심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일제 말기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을 문제 삼았다. 재심에서도 독립유공 훈장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필자는 국가보훈처의 공훈심사과가 나서서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사실과 친일부역 행위 여부'를 밝혀주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밝히지 못한다면 독립 유공 포상을 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공훈심사과 공무원은 필자에게 직접 벌교에 내려가 사실 확인을 하겠다고 말했다.
몇 달 뒤 공훈심사과 공무원으로부터 "벌교에 내려가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업에 대한 자료나 증언을 듣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 필자는 그렇다면 담당 공무원에게 "권승욱의 언어 독립투쟁이 명백히 있었음이 밝혀졌고, 1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니 결론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2014년 8월에서 2019년의 지금까지 5년간 국가보훈처의 공훈심사과는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사실과 친일부역 행위 여부'를 하나도 입증해 내지 못하고 있다.
공훈심사과의 공무원과 심사 위원이 지금까지 일제 말기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건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서, "일제 말기의 행적 불분명"이라는 불포상 사유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공훈심사과 공무원의 직무유기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공훈심사과의 공무원이 2차 자료에만 나오는 자료, 즉 최호연의 <조선어학회, 청진동 시절>(상)(1992, 진명문화사) 4쪽에 나오는 "금융조합에 취직은 했으나"라는 문구를 가지고, 권승욱이 '금융조합에 취직했기에 포상을 승인할 수 없다'라는 사유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점에 대해 필자는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판단한다.
2차 자료에만 나오는 자료를 가지고서, 1년간 옥고(1942. 10. 1.∼1943. 9. 18)를 치렀고, 더욱이 함흥경찰서(1942. 10. 1.∼1942. 10. 23.)에서 당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이후 1973년 서거할 때까지 고통을 당했던 항일투사 권승욱의 공적을 외면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권승욱의 독립운동
2014년 광복절에 필자는 '독립유공 포상 불가'라는 국가보훈처의 심사 결과를 통보받은 이후, 권승욱에 대한 자료나 증언을 확보하고자 발 벗고 나섰다.
필자는 일찍이 일제 말기와 해방 이후 권승욱의 행적을 이렇게 기술했다. 권승욱은 스승 정인승으로부터 조선어사전의 편찬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1938년 6월에 조선어학회에 참여했다.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 위원으로 이극로, 정인승, 이중화, 한징, 권덕규, 정태진 등과 함께 활동했다. 권승욱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조선어대사전 편찬 작업, 즉 언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최연소자로, 1942년 10월 1일에 피검되었다. 함경도 함흥경찰서에서 일제 경찰로부터 구타와 발길질, 물먹이기(일명 해전)를 당해 폐(허파)에 물이 들어가는 고문도 여러 날을 당했다. 홍원경찰서에서도 옷을 전부 벗겨놓은 상태에서 고춧가루 물을 먹는 물먹이기(일명 해전)와 비행기 태우기(일명 공중전) 등의 고문을 당했다.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년 만인 1943년 9월 18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출옥 뒤 고향 광주에서 쉬고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서민호(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름.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가 그를 벌교에 있는 송명학교 교사로 취직시켜주었다. 1944년 1월 15일부터 송명학교에 근무했으나, 1944년 3월 학교가 폐교된 뒤에 사임했다. 이후 금융조합에 취직했다.
해방 뒤 전남 벌교에서 열린 국어강습회에 강사로 강연했다. 1945년 9월 초 서울로 올라가 조선어학회가 추진 중이던 조선말큰사전 편찬 사업에 편찬 위원으로 다시 참여했다. 우리말의 뜻풀이를 계속했다. 1947년에서 1957년에 걸쳐 총 6권의 <조선말 큰사전>이 발간될 때에 모두 참여했다. 그 공로로 1957년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1957년 10월에 국정교과서 도서편찬심의회 국어과 위원(문교부 장관 위촉)으로 활동했다. 1958년 8월 중앙 지명 제정 위원회 위원(국방부장관 위촉)에 선임됐다. 1963년 10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1973년 3월 17일에 서거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2014년 겨울에 필자는 권승욱의 친구 이영균(李榮均, 1917년생)님을 발굴하여, 그로부터 같은 해 12월 30일에 권승욱과 관련한 글 한 편을 얻게 되었다. 이영균은 권승욱과 동갑이었고, 고창고보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40년 3월에 졸업했다. 1938년경에는 서울 종로 4가에서 권승욱과 함께 1년 넘게 하숙을 하기도 했다.
이영균은 경성의전 재학 시절에 성적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는데, 공부를 잘해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1943년경 전북 고창읍에서 작은 의원을 개업했다. 1948년 '이영균 산부인과'로 개업해, 이후 전주와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필자는 2014년 12월 30일 자택에서 이영균님을 뵌 적이 있다. 2019년 8월 10일 필자가 권오운씨를 만났을 때, 올해 8월 7일에 이영균님이 서거했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