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표지 사진
창비
앞서 예시로 언급한 표현 등을 입에 담은 사람들 중에서도, 진심을 담아 누군가에게 악담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경우도 물론 있다. 그저 나름 웃기려고 농담을 하려다가 분위기가 싸해졌거나, 별다른 고민 없이 말을 했을 뿐이라는 해명도 흔하다.
김지혜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가 쓴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는 '선량한' 사람이라도 차별과 혐오를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지적된다.
성소수자, 여성(혹은 남성), 외국인, 난민, 장애인 등의 존재들을 '그들'로 타자화하는 과정에는 '우리'라는 테두리를 정하는 일이 뒤따른다. 내가 속한 곳을 찾아 경계를 구분한 뒤, 그 테두리 바깥의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밀어내는 셈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편향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경계'가 실은 유동적이라고 설명한다. 제주의 예멘 난민 사태가 불거지기 불과 몇 달 전에,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갓 귀화한 외국인 출신 선수들을 한국인들이 목청껏 응원했던 일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감각의 차이는 두 집단을 가르는 경계에서 생긴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 즉 '그들'을 쉽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속한 내부 집단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더 인간적이라고 느낀다. 반면 외부 집단은 훨씬 단조롭고 균질하며 덜 인간적으로 보인다. (중략)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집단을 가르는 마음의 경계를 따라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만들어진다." - 본문 50~51쪽 중에서
결국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 우선이다. 개인의 성별과 피부색, 국적과 성적 지향 등을 따져 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누구든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기 마련이다. 실제로도 이미 온라인에서 '급식충'(아동·청소년), '똥꼬충'(게이), '맘충'(엄마), '틀딱충'(노인), '병신'(장애인)과 같은 비하적 표현을 흔히 마주치게 되지 않는가.
오늘날 태어난 곳이 다른 국가였다면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가 돼 난민 신세였을지도 모른다. 불과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백인-흑인 학생이 다니는 학교를 분리하는 법이 시행됐으므로, 당시 거기서 태어났다면 어느 인종이냐에 따라 학교마저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내가 선 자리에서 누군가 받는 차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이 차별을 눈앞에서 지우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나도 미처 모를 사이에 내가 무언가를 더 누리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