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맞춤법 통일안 2독회 회의를 마치고화계사에서 촬영(1933. 8. 3.)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현배,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권덕규, 마지막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윤재.
박용규
그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주최한 '하기 한글 강습회'에도 강사로 참여했다.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경기도 대표)에도 이름을 올렸다.
1936년부터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일제 비판을 폭주(暴酒)로 달래다가 만년에 반신불수가 됐다. 혹 그의 지나친 음주를 염려하는 친구가 농담으로 "무엇 때문에 그리 술을 먹나?"라고 물으면, 그는 "왜놈들의 하는 짓은 말할 것 없고, 요새 가짜 왜놈들의 하는 꼴이란 술 취하지 않는 맑은 눈으로는 볼 수가 있어야지!"라고 대꾸했다. 또는 "그놈들의 맑은 정신으로 지껄이는 소리가 나의 취담만큼 깨끗하지 못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정인승, '권덕규론', <사조>1-5, 사조사, 1958, 10, 82쪽). 이처럼 그는 일본인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 조선어학회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 그는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 저서로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 등이 있다.
그는 국어학자요, 역사가였다.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 이들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