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기념 창작오페라로 만들어진 박상진의 표지
울산MBC
"경주에서 최고 부자인 교촌 최부잣집 재산은 만석이 넘었고, 그다음 부자인 우리 가문은 만석에 가까웠고, 대한제국 최초의 판사였던 박상진 의사 가문은 8천석 부자였습니다. '대한광복회'를 만든 박 의사는 12대 만석꾼이던 최준에겐 재무부장을, 백부에겐 사업총괄을 맡겼습니다. 독립운동으로 의기투합한 세 가문은 친인척이었습니다. 박 의사는 경주 최부잣집 사위였고 백부에게 박 의사는 외 육촌 매부이고, 백부에게 최준은 외 육촌 형이었습니다."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평안도, 경상도, 함경도, 전라도, 황해도 등 국내 8개도와 만주 단동과 봉천 등의 해외 조직을 둔 무장독립운동단체다. 독립운동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일제의 세금 마차와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장군은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으로 만주 지역 책임자였다.
박상진 의사는 대한제국 최초의 판사시험에 합격했으나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망국의 상황에서 부임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면서 비밀·폭동·암살·명령 등의 투쟁 강령을 만들어 친일 부호와 악덕 관리들을 처단하면서 민족반역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고헌은 1918년 일경에 피체돼 1921년 대구교도소에서 순국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백부는 박상진 의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습니다. 백부가 박 의사와 단둘이 만주에 간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백부가 보낸 군자금이 독립운동에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군자금을 계속 대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근에 최 부잣집 경주 고택에서 최준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했던 자료가 발견되면서 독립운동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백부는 자료를 남기지 않은 것 같고, 가문의 누구도 나서지 않으면서 백부의 독립운동이 사라진 측면이 있습니다."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복우는 육촌 매부로 네 살 연상인 고헌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복우는 1915년 결성된 대한광복회 본부 조직에서 사무와 사업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민족반역자 처단 등의 전략을 수립, 국내·해외 조직에 지시하고 전달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1918년 고헌이 일경에 붙잡히고 조직원들이 투옥되자 이복우는 만주 등지에서 4년간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21년 경주로 돌아와서 최준과 경주상회를 설립한 뒤 사장을 맡아 군자금 마련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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