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아노, 1534년경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마네의 <올랭피아>는 잘 알려져 있듯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삼아 비슷한 구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티치아노의 '비너스'가 이상적인 여성 신체의 모습으로 신화화된 누드화였다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여성 신체의 곡선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평면적인 묘사에 그쳐 밋밋한 느낌을 주었다. 티치아노의 비너스가 자연스런 빛에 노출된 감각적인 색채의 몸이라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인공적인 강렬한 조명에 노출된 육체를 선으로 드로잉하듯 그려내어 현실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올랭피아>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었는데, 그녀는 <풀밭 위의 점심>에 등장해 유명해졌고 그녀 자신도 화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고전적인 여신이 등장해야 하는 여성 누드화에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 그것도 소녀 같은 여성이 도전적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을 마네가 내놓았던 것이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애초에 '비너스'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이후에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네의 그림은 처음 '비너스'의 이름을 넣었다가 바꾸었다.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도발적인 눈빛과 탐욕스런 욕정을 노출하고 있음에도 신화화된 여성성으로 포장되어 있다면, 마네의 비너스는 강한 직접 조명에 의해 노출된 매춘 여성의 나체를 마주한 느낌을 준다.
마크 트웨인이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대해 그 노골적인 음란함과 성적 욕망의 발산에 대해 공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럼에도 비평가와 관람객 누구도 이 그림을 비난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적인 명작으로 추앙받으며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의 '관음증'을 당당하게 만족시킨다. 티치아노의 그림이 귀족 남성들의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한 애초의 의도에 신화를 덧씌워 포장하는데 성공했다면, 마네의 그림은 오히려 신화적 의미화의 포장을 처음부터 벗겨냈다고 할 수 있겠다.
아! 관음증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한 비난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과거의 회화적 전통에 벗어난 혁신적인 기법과 구도를 이루어낸 바에 대해 당시 대중과 비평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과도한 공격의 이유 중 하나를 인간의, 특히 당시 부르주아 남성 계급의 관음증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그림의 관람자가 가장 거북함을 느꼈던 부분은 올랭피아의 '도전적 응시'에 있으며, 이는 고전적 여성 누드화가 만족시켜 주었던 관음증의 쾌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다.
관음증은 일반적인 의미로 '타인의 벗은 몸이나 성적 행위를 비밀스럽게 지켜보면서 성적인 쾌락과 만족감을 느끼는 도착적인 행위'의 일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윤리적, 도덕적 판단 기준과 관음증의 수위와 정도에 따라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의 논의는 단순히 '일상생활에서의 은밀한 훔쳐보기'에 국한하겠다.
관음증의 쾌락은 훔쳐보는 대상이 관람/관찰의 대상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을 때 극대화된다. 즉 무방비의 대상을 일방적으로 관찰할 경우 최대의 만족감을 얻게 될 가능성이 크며, 관찰 대상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경우 관찰자와 관찰 대상자 상호간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며, 관찰자 역시 언제든 응시의 대상으로 위치가 역전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게 된다.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입장이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관찰 주체에게 쾌락을 줄 수 없으며, 반대로 자신의 우월한 위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점과 쾌락에 대한 욕망을 들켰다는 점에서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마네 그림 속의 여성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주 당당한 태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정면에는 당연히 관찰자가 있을 자리이고, 관찰자는 여성의 벗은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고자 기대한다. 그렇지만, 강렬한 불빛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올랭피아의 납작한 나신과 그녀의 당당한 응시의 눈길이 돌아온다. 당연히 관찰자 '나'도 '고객'으로 소환될 수 있다.
관찰자는 관음증에 대한 욕망을 채울 가능성은커녕 어색한 장면에 끼어들었다는 무안함만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 동안 무안함이나 어색한 느낌 없이 지극히 이상적으로 묘사된 여성의 신체를 감상해 왔던 관찰자에게, 관음증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는 쾌락을 빼앗긴 불쾌감으로 급격하게 전환될 수 있다. 이러한 불쾌함은 곧 그림에 대한 강렬한 비난과 공격으로 전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