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헤렌이 그린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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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재판정에서 증거를 만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막상 그가 붓을 들자 그림 실력이 보통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 적어도 표현의 테크닉만큼은 거장의 수준에 달했다. 여론은 갑자기 파렴치한 전범에서 나치를 농락한 의적으로 변했다.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럴싸한 영웅으로까지 비쳐졌다.
그가 위작 화가로 나선 계기는 복수였다. 델프트공대 건축가를 나온 그는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 다시 아카데미에 들어가 미술 수련을 했다. 나름대로 화가로서의 실력은 갖췄지만 그의 화풍은 시대적 흐름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가 신봉하는 고전적 기법은 20세기 초 유행하는 모더니즘과 거리가 있었다. 아니 거리가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닥다리 취급당했다.
그가 보기에 과장된 자의식, 비정형적인 도상, 이미지의 파편 등으로 화장한 모더니즘은 일그러진 문명의 그림자였다.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 이름부터 괴상망측하지 않은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모더니즘이 진정한 미술인양 떠들어대는 비평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잡지 <투계(鬪鷄)>를 발행하여 그야말로 싸움닭처럼 주류 비평가와 화단을 공격했다. 그들의 허위의식과 횡포를 고발하고 관념적 허영과 권위의식을 비판했다. 그럴수록 그는 주류 미술계에서 점점 더 소외당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공격하기로 맘먹었다. 그들의 권위의식과 허위의식을 한 방에 날려버릴 통쾌한 복수를 꾸민 것이다.
모두를 속이다
아브라함 브레디우스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권위자이자 베르메르 작품에 관한 최고 감정가이다. 그가 베르메르의 작품에 연대기적으로 공백이 있는데 알려진 종교화 작품이 너무 적은 것으로 보아 향후 새롭게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메이헤런은 브레디우스의 글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메이헤런은 꼼꼼하게 준비하고 차근차근 착수했다. 베르메르의 스타일과 표현 기법을 익히는 건 물론이고, 어떡하면 그림이 300년 전 것처럼 보이도록 할 것인가도 연구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캔버스를 구해서 당시 화가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스케치하고 베르메르가 사용했다는 붓과 똑같은 것을 구해 연습했다. 그림에 색칠한 후 화학약품을 사용해 세월 속에서 바래진 것처럼 바니시를 변색시켰다. 그런 다음 열기를 쬐어 바싹 말리고 가죽 공을 그 위에 대고 굴려 균열이 생기게 했다. 마지막으로 갈라진 틈에다가는 검은 잉크를 채워 넣어 세월의 흔적을 넣었다.
메이헤렌은 위작 기술을 완성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그는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을 브레디우스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박사는 감정서를 제출하면서 '세기의 발견'이라고 극찬했다. 메이헤런은 화상으로 변신한 다음 몇 개의 위작을 더 만들어 유통시켰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네덜란드 예술협회도 그의 위작을 베르메르 작품이라며 구입을 했고, <엠마오의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네덜란드 최고가를 기록하며 로테르담의 미술관에 버젓이 걸리기도 했다.
위작이 성공을 거두자 메이헤런의 생각이 달라졌다. 화단 권위자들의 위선과 저급한 안목을 까발려 통쾌하게 복수하고 나아가 부조리를 혁파한다는 대의(大義)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짭짤한 수익에 입맛을 다셨다. 지폐를 세는 손맛에 공분(公憤)은 공중분해 된 것이다. 메이헤런은 본격적인 위작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재판으로 밝혀진 위작 사건으로 인해 학계와 평단의 권위는 추락했다. 그의 복수는 성공했다. 그러나 복수의 성공이 개인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의 재능은 인정받았지만 그의 행위까지 죄를 면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도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위조 사건의 주인공으로만 회자되었다. 그는 1947년 재판이 끝난 직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메이헤런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