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의 작품 '델프트 풍경' <출처: 위키피디아>
황인규
뵈르거 덕분에 국제적 스타가 됐지만 그의 작품은 이미 전세계에 흩어져 일목요연한 감상은 힘들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가 활동했던 델프트에서조차 그의 작품을 단 한 점도 구경할 수 없지 않은가. 베르메르는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 오히려 신비화되었고 그의 작품에 대한 시비도 그치지 않았다. 뵈르거가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던 117점은 세월이 지날수록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숫자가 점점 줄어 현재는 37점만이 베르메르의 진품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베르메르의 작품 세계는 너무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미술전공자도 아닌 필자가 첨언하는 건 우물물 한바가지 퍼서 도도한 강물에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미학과 도상학적 해석은 미술 전공자들이 쏟아놓은 말의 잔치만 주워 담아도 소화불량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개의 작품에서 지극히 협소한 시각으로 특정한 내용을 덧붙이는 일뿐이다.
베르메르의 명성에 한동안 공백기가 있던 탓에 소문과 억측 그리고 엉뚱한 사건이 지난 백년 간 끊이지 않았다. 베르메르를 논쟁의 한복판으로 끌고 간 몇 가지 화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렘브란트와의 관계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두 사람은 한 세대 차이가 나지만 네덜란드 황금기 시절을 공유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두 사람의 그림에서 시대를 읽고 역사를 떠올린다. 그런 다음 그 시절의 영광을 음미한다. 그만큼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이 둘은 문화적 자존심의 원천이다.
몇 년 전 영국 BBC 방송에서 <파워 오브 아트>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여기서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가 누구인가를 놓고 전문가들끼리 토론을 하고 청중들이 투표하는 이벤트까지 했다. 화풍과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을 대놓고 우열을 가리는 건 대중들의 호기심에 편승한 천박한 이벤트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이 둘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묶여서 대중들에게 호출되었다. 혹시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있다. 암스테르담과 델프트 사이 거리가 그리 멀리 않고, 화가로서의 활동 기간이 20년 정도 중복되는데 작품 제작은 대부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러니 거장들끼리 잠깐이라도 만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추측성 주장을 접하다보면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는 베르메르가 렘브란트의 제자였으면 하는 소망이 잠재돼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베르메르가 렘브란트의 화실에 직접 지도를 받은 제자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고 화풍을 이어받으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게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 싶어 한다. 대중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문비평가들도 틈만 나면 이 둘을 엮으려고 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