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해주세요'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일본제품 불매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남소연
지금의 한일 무역분쟁과 외견상 유사한 사건이 130년 전인 1889년에도 있었다. 이때는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방곡령 사건'이 그것이다. 누가 수출을 규제했는가는 다르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공통적인 게 있다. 고압적인 쪽은 똑같이 일본이라는 점이다.
조선 멸망 21년 전인 1889년에는 세계적으로 곡물 사정이 어려웠다. 1889~1891년 기간은 1876~1879년 및 1896~1902년 기간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뭄 피해가 심했다.
아프리카 최남단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서북쪽에 나미비아가 있다. 대서양 연안에 있는 이곳은 1800년대 후반에 독일인들이 일확천금을 목표로 몰려들었던 땅이다. 1883년 이곳에서 독일인 아돌프 뤼데리츠는 16km에 달하는 해안가 땅을 영국 돈 100파운드와 총기 200정을 주고 매입했다. 이때는 헐값이라도 지불됐지만, 대가뭄이 휩쓴 뒤인 1892년에는 그나마 그런 돈도 제공되지 않았다. 길이 1600km에 달하는 해안가 땅이 무상으로 독일인들에게 넘어갔다. 약육강식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될 정도로 세계 식량사정이 안 좋았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인들도 조선에 대한 경제 침략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은 식량 및 생산 원료를 수출하도록 하고 일본은 공산품을 수출하는 분업 구조가 일본의 희망 사항이었다. 일본 경제의 이익을 위해 조선 경제를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 때 사용하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속에서 일본 기업들은 조선 식량을 헐값에 매입하는 데 주력했다. 2000년에 작고한 김옥근 전 경상대 교수의 <한국 경제사>는 "일본 상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쌀 1섬을 40~45전의 헐값으로 사서 일본 시장에서 6~8원에 팔아 10배 이상의 막대한 폭리를 취하였다"고 설명한다.
일본 기업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같은 무역구조는 조선 백성들의 생계에 직접적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소작농과 서민층의 식탁에 올라갈 쌀·콩 등의 부족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일본의 식량 약탈... 민중의 요구가 반영된 방곡령
이런 속에서 1889년 하반기 함경도에서 실시된 곡물수출 규제 조치가 바로 방곡령이다.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원산항을 통한 함경도산 콩 수출을 1년간 금지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 상반기 황해도에서도 관찰사 조병철(趙秉轍)에 의해 방곡령이 발동됐다. 조병식(趙秉式)과 형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조병식은 양주 조씨로서 조유순의 아들이고, 조병철은 풍양 조씨로서 조발영(친부 조대영)의 아들이다.
조병식의 방곡령은 조선 식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리사욕을 위한 일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당시의 정치 평론가인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인들이 함경도에서 콩을 무역했다. 이는 외무아문의 지시로 하는 일이었다. 감사 조병식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빙자해서 항구로 빠져나가는 것을 엄금했다. 그것은 조병식이 백성들의 먹을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고, 성격이 실로 집요한 데다가 일에 어두웠고 또 일본인의 뇌물을 낚아보기 위해서였다."
함경도 백성들의 먹거리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벌인 일이지만, 일본 기업들한테 뇌물을 받을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조병식이 탐관오리로 알려져 있다 보니, 그의 방곡령이 그렇게만 비쳤던 모양이다. 조병식은 조병철과는 형제관계가 아니지만, 동학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과는 사촌관계였다. 조병식도 청렴한 공직자가 아니었으므로, 방곡령이 의심을 받을 만했던 것이다.
조병식의 동기는 의심 받았지만, 방곡령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정당한 조치였다. 한국사연구회가 1985년 발행한 <한국사 연구> 제50호·제51호 합본에 실린 하원호의 논문 '개항 후 방곡령 실시의 원인에 관한 연구(하)'는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잇던 도시의 빈민이나 농촌의 임노동(賃勞動) 계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방곡령 실시 요구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한다. '임노동'은 임금 노동의 약칭이다.
이처럼 방곡령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조선 민중의 요구 사항이었다. 일본인들이 식량을 수입해 가는 게 아니라 약탈해 간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베 신조는 경제보복의 명분을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다. 신뢰 문제 때문인 듯이 하기도 하고, 안보 문제 때문인 듯이 하기도 한다. 실상은 역사 문제 때문이지만, 그것은 정면으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자국의 전쟁범죄가 들춰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만 제기하고 있다.
그와 달리 1889년의 조병식은 당당히 할 말이 있었다. 탐관오리인 그의 입에서도 '우리 함경도 백성들을 위한 조치'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만큼 정당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 역시 탐관오리였으면서도 '조병갑의 사촌'으로 기억되기보다 '방곡령의 주역'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발포한 방곡령이 그만큼 정당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은 가만있지 않았다. 왜 수출을 안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조선 백성들의 식량 사정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점에는 관심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문제를 일으킬 뿐이었다.
조병식은 1883년 체결된 조일 통상장정(한일 통상장정)에 따라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중앙정부를 통해 일본 영사관에 통지했다. 그런데 일본 영사가 통지를 받은 날은 방곡령 시행 13일 전이었다. 그는 1개월 전에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방곡령 연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조병식은 예정대로 시행했고, 일본 기업들은 곡물 구입에 차질을 겪게 됐다.
일본은 이를 외교문제로 비화시켰다.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이 발포한 방곡령까지 한 데 묶어 조선 정부를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위의 <한국 경제사>는 이렇게 말한다.
"1889년과 그 다음해에 황해도와 함경도에 실시된 3건의 방곡령에 대해서 일본이 한일 통상장정 조항에 위배된다는 터무니없는 말썽을 부려 외교문제로 번져 4년 동안에 걸쳐 시비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는 서양식 국제법과 외교협상에 미숙했다. 또 고종이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다면서 청나라군을 불러들인 게 화근이 돼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주체적인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굴복했다. 위 인용문의 이어지는 대목이다.
"결국 일본의 비타협적인 강압적 요구로 말미암아 3건의 방곡령에 대해 조선 정부가 11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4년간이나 끌었던 양국 간의 분규가 해결되었다."
군사력 과시하며 위협... 조선 정부 압박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