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시위용 피켓제자의 도움으로 제작한 1인 시위용 피켓. 때가 때이니 만큼 거친 표현을 최대한 자제했다.
서부원
지난 토요일(3일) 오후, 전지 크기로 제작한 피켓을 들고 신오쿠보 역 앞에 섰다. 사실 추모 동판 곁에 나란히 서서 1인 시위를 할 작정이었는데, 이내 역무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철도 영업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철도는 민영화되어 대부분 사기업 소유다.
역무원에 따르면, 철도 영업법 상 객차 안은 물론, 플랫폼 등 역 구내에서는 기부와 물품 구매 요구, 홍보물 배부와 권유, 방송 유세 등이 금지돼 있다고 한다. 필요할 경우 반드시 본사나 역무원에게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그는 1인 시위가 유세에 해당된다고 해석했다.
이수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토록 자상하더니, 피켓에 적힌 내용을 본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더듬기도 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현장에서 한일 관계의 회복을 주장한 것일 뿐인데,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주말 오후인데도 신오쿠보 역 주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역과는 달리 출입구가 한 곳뿐이어서 들고나는 사람들이 한데 엉켜 더욱 복잡했다. 피켓을 품에 안듯 들고 있으면 오가는 사람들로 가려서 시위의 효과를 전혀 거둘 수 없을 정도였다.
전철이 도착한 뒤 사람들이 역 밖으로 쏟아져 나오면 피켓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틈이 생기면 내리기를 반복해야 했다. 다행히 그늘이 져 2시간을 견뎌냈지만, 당일 도쿄의 낮 기온은 섭씨 35도에 육박했다. 땀이 등골을 타고 팬티까지 적시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무더위였다.
살인적 무더위... 젊은 남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피켓에 눈길을 주는 이들이 의외로 적었다. 앞뒤를 가로막고 선 사람들을 뚫고 역에서 빠져나오느라 찬찬히 읽을 여유가 없었던 거다. 외려 북적임이 덜할수록 부러 앞에 와서 내용을 읽고 스마트폰에 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인 시위의 주요 '고객'은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역을 오가는 이들 대부분은 20, 30대 청년들이었는데, 그들에겐 잠시나마 눈길이 머물 여유조차 없었다. 죄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디론가 바삐 떠났고, 외려 넘어질까 걱정이 됐다.
일본의 청년들 대부분은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제자의 말이 떠올랐다. 주중이고 주말이고 신주쿠와 시부야의 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이지만, 선거일이 법정 공휴일이 아닌 것에 대해 문제 삼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30대 중반까지 단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다는 직장 동료도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하물며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까지 관심을 갖는 오지랖 넓은 젊은이는 일본엔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단다. 취업이 잘 되고 임금만 오른다면, 누가 집권하든 자기 알 바 아니라는 거다. 아베가 10년 동안 총리를 연임하고, 자민당 1당 독재가 지속되는 배경엔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피켓에 적힌 문구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탓인지, 한 쌍의 남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시계를 연신 확인하는 걸로 보아 역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피켓엔 일본어와 한국어를 위아래로 나란히 써놓았으니, 일본인과 한국인은 아닐 테고 중국인 여행자일 거라고 여겼다.
"칭원(請問, '실례합니다'라는 뜻의 중국어)."
나름 익숙한 중국어로 비켜달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그들의 입에선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내용을 알면서도 앞을 가린 셈이다. 영어로 정중히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들은 퉁명스럽게 몇 마디 건네더니 자리를 떴다.
그들은 1인 시위를 처음 접해본 게 틀림없다. 다만, 주장에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무더위를 견뎌가며 목석처럼 피켓을 들고 선 이의 고통 정도는 공감해주길 바랐는데 내심 서운했다. 그런 그들을 나무라기보다 그때 피켓을 머리 위로 올리면 될 일이었는데, 괜히 비켜달라고 부탁했나 싶었다.
나름 보람된 일도 있었다. 중년의 서양인 여행자가 잠시 피켓을 들여다보더니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What happen?(무슨 일이죠?)"라는 느닷없는 질문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질문의 의도를 몰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순간 난감했다.
하지만, 적혀있는 내용을 설명해달라는 말에 이내 긴장이 풀렸다. 서툰 영어로 대답했지만, 그는 정확히 이해했고 보충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특히 수출심사 우대국가 명단인 '화이트리스트(White List)'의 의미와 한일 간의 갈등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그가 독일의 빌레펠트에서 부부가 함께 여행을 왔고, 며칠 뒤에 귀국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 겨울 독일에서 한 달을 지냈다고 하니, 마치 한 가족이라도 되는 양 다정다감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와의 짧은 대화중에 그의 부인으로부터 아이스커피 한 잔도 대접받았다.
절반의 성공... 다음은 평일 출근길 1인 시위다
피켓을 들고 선 2시간 동안 우려했던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인 시위를 한다고 했을 때, 국내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몸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외려 1인 시위를 방해한 것은 극우 세력의 해코지보다 무덥고 습한 도쿄의 여름 날씨였다.
북적이는 주말의 1인 시위를 자평한다면 절반의 성공이다. 당장 오가는 사람이 많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또 여행자가 아닌 일본의 현지인들에게 호소하자면 주말보다는 평일이 낫다는 판단도 섰다.
내일 아침, 드디어 주중 시위를 이어갈 작정이다. 출근 시간대인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한일 우호의 상징 신오쿠보 역에서 일본인 직장인들에게 그들의 손으로 뽑은 아베 총리의 경제 보복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적어도 아침의 도쿄 날씨라면, 웃으며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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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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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우호의 상징, 신오쿠보역에서 1인 시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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