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 보유자) 서울부터 목포까지 여러대학을 다니며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는 유지화씨는 아 이날도 쇠, 장구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서치식
우리 것은 낡고 후진 문화로 치부하며 근대화를 국가발전의 기치로 삼던 시대에 농악을 하는 예인으로 사는 일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길이어서 때려치우고 싶은 것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이었지만 호남 우도 농악의 내로라하는 스승들(박성근, 김재옥, 김성낙 이상 쇠, 이명식, 김오채, 이상 장고 등)의 가르침을 받은 그녀인지라 쇠, 장구, 부포놀이 등 여러 분야의 재능이 워낙 출중해 중앙무대에서 활동을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다.
정읍으로 농악을 배우러 다니던 때부터 거래하던 정읍의 악기상과의 인연은 그때도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정색을 하고는 "인자 정읍 농악은 다 죽어 버렸소. 난다 긴다 하던 분들도 나이 들어 돌아가시거나 농악을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그만둬 불고 정읍을 떠버렸소. 그래서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한번 배워볼라고 하는디 가르칠 선생을 구할 수가 없어요. 정읍 와서 우덜 좀 갈켜 주소. 무너진 정읍 농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요"하더란다.
그때도 이미 '유지화 속에 정읍 농악이 있다'는 세간의 평이 있었던 지라 평생을 악기장사로 농악판을 누빈 그의 안목은 정확했던 것이다. 간청에 못 이겨 농악을 가르치러 정읍에 와보니 배우려는 사람들 300여 명을 모아놨더라는 것이다. 왕성했던 정읍농악에 대한 향수를 가진 노년층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모인 것을 보고 서울에서 정읍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다보니 '정읍농악을 살리자'는 지역 여론이 일면서 정읍 국악원에 정식으로 강좌가 개설되어 그녀는 1993년에 정읍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호남우도농악보존회'가 설립되고 그녀의 명성으로 인해 우도 농악을 배우려는 수강생들이 경향 각지에서 줄을 잇게 되었다. 전수관이 없어 타 지역에서 온 수강생들이 묵을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아 지인들을 동원해 민박을 시켜가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정적으로 농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녀의 그런 각고의 노력과 지역에 모처럼 일어난 농악에 대한 열풍에 힘입어 1996년에 정읍농악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7-1호에 지정되고 그녀가 쇠 전수자로 등재되니 정읍으로 거처를 옮긴지 3년 만에 이룬 쾌거인 것이다. 문화재가 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발 벗고 나서 외지에서 오는 전수생들의 숙박시설을 완비한 지상3층의 정읍우도농악전수회관을 짓게 되고 시립농악단 창단까지 이어져 호남우도농악의 본산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