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식 장군 고향 후배 유적지 답사단 일동이 '허형식희생지' 기념비 앞에서 제사 후 기념 촬영(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윤정우,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송성진, 임영태).
전병택
아마도 올해 제삿날은 그 어느 때보다 흐뭇하셨겠습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반갑다"는데, 10명이 넘는 후배들이 산 넘고 물 건너 만리 타향 북만주까지 찾아왔으니 무척 감읍했을 테지요. 더욱이 그들은 고향 선산들판에서 거둔 쌀과 고국에서 빚은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드리면서 합동으로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 반가움과 고마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조선은 물론 만주조차 강점한 일제는 1940년부터 장차 소련 진공을 대비하는 한편, 동북 항일 반만세력들의 뿌리를 뽑고자 그들의 관동군을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대폭 증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동북 일대의 항일 반만 세텩들은 모조리 조선 참빗질을 하듯이 샅샅이 낱낱이 싹싹 토벌했다지요.
이에 중국 북만성위원회는 항일 세력의 싹을 살리고자 그해 연말부터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케 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김책, 최용건과 같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들은 러시아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허 장군님만은 단 한 번도 소련으로 월경치 않고, 동북의 인민들과 당신의전구(戰區)를 지키면서 소부대 현지 지도로 끝까지 일제와 맞서섰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가 될 수 없다는, 당신의 신념이요, 금오산인의 자존심이었을 테지요.
허 장군님은 1942년 8월 3일 소부대 현지 지도 중, 북만주 청송령 외진 산골에서 위만(僞滿, 괴뢰만주국) 군경 토벌대와 교전하던 중 장렬히 희생하셨습니다.
저는 1999년 여름, 허 장군님 사돈집안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 임시정부 국무령 후손 이항증 선생과 항일무장투쟁 선봉장 일송 김동삼 선생 후손 김중생 선생의 안내로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갔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허 장군님 유품과 행적을 보고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때 두 분 선생님을 통해 거기 모셔진 허형식 장군님은 구미 금오산 출신으로, 동북 제일의 항일 명장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처럼 흥분했습니다.
게다가 허 장군님은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의 조카라는데, 구미 출신으로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저는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러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구미 출신 작가로서 필생을 다해 써야 할 작품의 주인공을 만났기 때문에 무척 기뻤습니다.
그때 연길에서 만난 연변대 박창욱 교수로부터 추천받아 구입한 <결전>이라는 책 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처음 대할 수 있었습니다. 허 장군님의 그 늠름한 모습은 같은 남자로서도 반할 모습이기에 귀국 후 이를 스캔해 액자에 담아 지금도 제 서가 한 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동포 김우종 선생이 쓴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편에서 허 장군님의 최후 희생 장면을 읽고 크나큰 느꺼움을 받았습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 로버트 조던을 연상케 했습니다. 로버트 조던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희생했지만, 허 장군님을 부하를 위해 희생하셨지요.
'희생'이란 동서고금 시공을 초원하여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누군가 희생을 통하여 굴러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