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각급 종교를 손아귀에 넣고자 획책했다. 불교의 경우 1911년 한반도의 전국 사찰을 30개 교구(敎區)로 나누어 본산(本山)을 두었다. (1924년에 구례 화엄사를 포함시켜 31 본산) 서울의 봉은사를 비롯 김성숙이 승려생활을 하는 양주의 봉선사 등 전국 주요사찰이 모두 포함되었다.
사찰의 주지를 조선 총독이 직접 임면하고 본산 산하에 있는 각급 사찰은 주지가 관할토록 하는, 철저한 통제체제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이 땅에 들어온 조선불교는 병탄 1년도 안 되어 일본의 조동종에 예속되고 말았다.
봉선사의 김성숙은 이같은 불교계의 참담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봉선사의 주지 홍을초는 행동반경이 대단히 넓은 승려였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만해 한용운, 범어사 승려 김법린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손병희가 오면 김성숙에게 시중을 들게 하였다. 봉선사에서 홍을초를 비롯 손병희ㆍ한용운ㆍ김법린 등이 모여 모종의 거사를 논의하고, 김성숙은 이런 움직임을 체득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를 님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김성숙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착오인 듯하다.
열여섯 살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기독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는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같은 열 여섯 살에 집을 뛰쳐나와 금강산에 가서 중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산 한가운데 있는 유명한 유점사(楡岾寺)에서 그는 불교 뿐만이 아니라 현대철학도 연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1919년까지 머물러 있었다.
이 몇 해 동안에 이 젊은 승려는 일본어를 공부하여 칸트, 헤겔, 스피노자의 저작을 일본어로 읽었다. 그에게 있어서 헤겔은 하늘의 계시자였다. 그래서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열광적으로 심취하였으며 그의 변증법에 빠져들어갔다. 그 당시 아직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1919년에 김충창은 불교독립당에 들어갔다. 당시 이 당은 약 삼백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독립에 관한 선언을 공표하였다. 3ㆍ1운동 때 김충창은 마을에 내려가 선전활동을 하였다.
- 물론 가사를 입고서, 당시 그는 스물 네 살이었다. 그는 왜놈에게 서울에서 체포되어 일 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풀려나자마자 그는 '강연단'을 조직하여 선전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주석 2)
주석
1> 임혜봉, 『불교사 100장면』, 293쪽, 1994, 가람기획.
2> 님 웨일즈 지음, 조우화 옮김, 『아리랑』, 275~276쪽, 동녘,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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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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