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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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에라스무스 다리를 왕복하고 보니 제법 다리도 아팠다. 발길을 다시 중앙역으로 향하다 용변도 해결할 겸 맥도날드에 들렀다. 유럽은 화장실 인심이 후하지 않아 상업시설을 이용하면서 해결하곤 한다.
화장실이 귀할 뿐만 아니라 툭하면 유료여서 공공시설을 무료로 이용하던 우리의 습관으로 볼 때 왠지 야박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우리네 화장실 인심이 너무 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50센트유로지만 파리에서는 1유로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세상에, 소변 한 번에 1300원이라니! 차라리 방광 터지고 말지, 얼굴을 찡그리며 끝까지 참던 아내였다.
중앙역으로 돌아오니 5시 경이었다. 암스테르담 행 열차에 오르니 피곤이 몰려왔다. 기차가 출발하자 설핏 기운 해가 유리빌딩을 빨갛게 색칠하고 있다. 로테르담을 일별하면서 본 개성 만점 건물들에 서열을 매기자면 단연코 큐브하우스가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참외처럼 샛노랗게 매달린 큐브 열매, 로테르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풍경일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지 십오 분 정도 되자 델프트 역에 정차했다. 갑자기 집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내리자! 한다. "우리가 언제 또 오겠어." 아내는 홀린 듯 입구로 나갔다. 아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와 딸도 따라 내렸다.
델프트에서 내리다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직 아워'라는 용어가 있다. 여명이나 석양 무렵 빛과 어둠이 서로의 자리를 내주고 섞이면서 채도가 낮은 광경을 연출한다. 여명에는 연한 복숭아색이 빛의 알갱이 속에 스며있는 것 같고, 낙조에는 푸르스름한 색이 세상에 내려앉는 느낌이다(나의 주관적 느낌). 세상에 필터를 끼우는 것 같은 이 색감에 매혹돼 많은 사진가들이 이 시간대를 즐겨 찾는다. 내가 델프트를 만난 건 허파에 코발트블루빛 공기가 가득 차게 되는 매직 아워 시간이었다.
델프트 역에서 중심지인 광장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린다. 광장에 도착하니 5시 30분경, 해가 설핏 기울며 어스름해졌다. 델프트 역시 물의 도시라서 운하가 거미줄처럼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소도시의 운하는 동네를 흐르는 개울처럼 친근하면서 운치가 있다. 집들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으로 좁은 면에 기다란 창을 가진 세로 주택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가파른 박공지붕과 집집마다 다른 벽돌색이 모자이크화를 보는 것처럼 시선의 분주함을 유도하는데, 이 분주함은 피로감이 아닌 생경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암스테르담보다 규모가 작은 주택들이 나란히 붙어 마치 레고블록처럼 아기자기한데, 집들이 운하에 비치니 마치 커다란 요술경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기조차 하다. 한마디로 현실 속의 동화나라 같다. 집사람과 딸아이도 연신 '예쁘다'란 말을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