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효리네 민박>에서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일상을 보여준 이효리-이상순 부부
JTBC
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해산물과 달걀, 우유는 먹는 채식주의자를 뜻한다. 페스코 채식을 실천하는 유명인으로 가수 이효리가 있다.
육류를 끊은 첫 번째 목적은 건강해지는 것이다. 고질적인 변비와 소화불량을 고치기 위해 생선과 채소 위주로 식습관을 바꿨다. 두 번째 목적은 가치관을 실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대량으로 키우고 죽여 상품화하는 공장식 축산이 불편해 소·돼지·닭의 고기를 피한다.
내가 채식하는 이유는 두 번째 목적에 좀더 가깝다. 하지만 누군가 '왜 고기를 안 먹냐'고 물으면 일단 첫 번째 목적을 댄다. 나의 채식으로 육식하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있다.
"상추는 안 불쌍해요?"라는 질문
20대 때 어느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인턴 비서로 일한 적 있다. 함께 인턴으로 일한 동료는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분으로, 영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대학원 석사까지 마친 남자였다.
의원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던 어느 날이었다. 오삼불고기와 훈제오리가 반찬으로 나왔다. 육·해·공이 총출동한 메뉴를 보다가, 앞에 앉은 그에게 작은 고민을 털어놨다.
"인간의 미각을 위해 살다 죽는 동물들이 불쌍해요. 고기를 끊고 싶은데 생각만큼 잘 안 돼요."
당시에는 외국물을 좀 오래 먹은 그가 진보적 가치와 다양성을 존중해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오바마 같은 유연한 화법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트럼프 같은 맹렬한 공격이었다.
"동물만 불쌍해요? 상추는요? 겨우 싹 틔우고 자랐는데 인간에게 처참히 뽑히잖아요. 얼마나 딱해요. 물은요? 물도 생명이라고 하잖아요."
그날 호되게 털리며 겁을 먹은 뒤로는 '정치적 목적으로 채식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세미 베지테리언이 됐지만 지금도 굳이 정체성을 먼저 밝히지 않는다. TV토론에 오른 유력 대선 후보처럼 채식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추궁당하는 상황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엄마였다. 엄마는 인간이 밥과 고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내가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면 엄마는 꼭 핏기가 선명한 소고기를 구워줬다. 채식에 도전하는 내게 엄마는 가장 강력한 적군이었다.
부모님에게 채식을 커밍아웃하기로 한 날. 엄마는 부대찌개지만 사실상 햄찌개에 가까운 음식을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리는 엄마 뒤에서 기는 듯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엄마, 나 채식하기로 했어."
두려운 마음에 "~해"가 아닌 "~하기로 했어"라는 애매한 종결어미를 써가며 각종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채식의 장점을 설명했다. 잠시 침묵.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주인공 영혜가 고기를 끊자, 영혜의 아버지가 그녀 입에 탕수육을 쑤셔 넣는 장면. 혹시 우리 엄마도 아빠한테 일러서 내게 강제로 고기를 먹일까?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귀까지 들렸다.
"잘됐네. 채소 많이 먹고. 엄마가 뭐 만들어줄까?"
가장 격렬할 거라 예상했던 결전은 예상보다 허무하게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나의 의지와 인내뿐이었다. 혹시 몰라 싱크대에 숨겨뒀던 독일제 젤리를 버리고(동물성 젤라틴으로 만들었다), 배달 앱을 스마트폰에서 지웠다(식당들이 대부분 고기 위주다). 그렇게 시작한 채식은 이제 3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다.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