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 1788년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을 <산 이시드로를 향한 순례>보다 약 30년 전인 1788년에 그렸다. 전경에는 산 이시도르의 축제에 마드리드 근교 초원으로 소풍을 나온 군중이 즐겁게 여흥을 즐기는 모습이 꼼꼼히 재현되어 있다. 원경에는 마드리드의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쾌활하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풍경이 조화를 이룬다.
고야는 성 이시드로를 테마로 그린 두 개의 그림을 마치 문명과 야만의 특징적인 부분을 대조하듯이 그렸다. 호화로운 마차가 연이어 있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젊은 남녀들이 여흥을 즐기며, 왕궁과 교회와 같은 웅대한 건물이 즐비한 마드리드의 도시 풍경을 묘사한 그림은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질서정연한 세계의 모습이다. 반면 하늘과 땅이 모두 검은 빛이 지배하는 척박한 공간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는 군중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은 무질서와 광기가 난무한 야만적 미신 행사처럼 보인다.
고야는 젊은 시절 스페인 왕가의 궁정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고야가 수월하게 궁정화가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궁정화가가 되는 과정인 왕립 아카데미의 경연대회에서 몇 번을 낙선하였으며, 궁정에 공급하는 테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다가 1780년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1789년에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1795년 마침내 왕립 아카데미 회화부의 감독이 되는데, 이는 처남인 바예우의 죽음으로 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고야의 작품에서 분열이 드러나는 분기점을 1792년으로 보는데, 그해 11월 고야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평생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야 작품의 극단적 분열의 양상은 크게 보아, 쾌활한 표정의 남녀들이 여흥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테피스트리의 밑그림, 화려한 의상과 장식을 과시하는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 그리고 종교화가 한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