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은 지난 2017년 7월 6일 G20정상회의가 열렸던 독일 함부르크 시내 미국총영사관에서 진행된 한미일 정상만찬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금의 한국 정세를 구한말에 비유하는 목소리가 많다. 물론 한국의 국력이나 세계질서 등을 놓고 보면, 구한말과 다른 점들이 많다. 남북이 분단돼 있다는 점도 다르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구한말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유사한 측면은 있다. 외세의 각축이 존재한다는 점이 그렇다. 일본은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고, 미국은 무역 문제나 주한미군 방위분담금 등을 놓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군용기 연합훈련 중 한국 영공과 방공식별구역을 각각 침범했다. 방공식별구역은 영공에 접근하는 비행물체의 식별과 통제 등을 위해 설정하는 구역이다. 영공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지금 전개되는 외세의 각축은 구한말에 비해 심각하지는 않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외세의 각축으로 위기에 봉착했다는 점에서는 지금이나 그때나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구한말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 참고가 될 만하다.
조선을 망하게 한 두 가지 요소
그런데 구한말 상황을 거론할 때마다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조선 멸망의 원인을 지나치게 '외부'에서만 찾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문명 개화를 조금 더 일찍 했더라면, 외교를 조금 더 잘했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들이 많다.
물론 외교도 중요했다. 그때 외교를 보다 잘했다면 양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최초의 시장개방이 이뤄진 1876년부터 조선이 멸망한 1910년까지를 살펴보면, 외교 못지않게 혹은 더 중요한 두 가지가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과 접하게 된다.
그중 한 가지는 조선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계적 격동기였던 그때, 정부가 중심을 못 잡은 게 위기를 고조시키는 핵심 원인이 됐던 것이다.
1876년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한 지 3년 뒤였다. 고종은 아버지와 정반대 전략을 표방했다. 외세를 끌어들여 그들끼리의 경쟁을 유도하면 외세가 힘을 잃게 돼 자주독립이 쉬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전략에 따라 고종은 1876년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고 1882년 청나라의 중재 하에 미국에 시장을 개방했다. 뒤이어 영국·독일·러시아 등에도 시장을 열어줬다.
그러나 상황은 고종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되레 그로 인해 초래된 것은 1882년부터 1894년까지의 내정간섭이었다.
청나라 중재 아래 서양과 국교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해지던 1882년, '임오군란'이라는 민중반란이 발생했다. 그러자 고종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이 군대는 민란을 진압한 뒤 내정간섭 군대로 돌변했다.
이때부터 12년간 고종은 허수아비가 됐고, 청나라가 파견한 진수당(쳰슈탕)과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조선 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고종은 자주독립을 지키고 싶었지만, 내정간섭을 받는 상황에서 자기 뜻을 펴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