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희생, 에칭, 1655 워싱턴 국립미술관
지봉근
회화적 재현은 어떤 사건이나 행위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린 것이라고 해도 화가가 그 장면을 재현하는 형식과 내용, 그리고 소재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를 집약·축적하여 시각화한 것이다. 화가는 어떤 역사적 장면을 회화로 재현하기 위해 관련된 역사, 일화, 시대상황, 인물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러한 요소들을 선별하며 가장 효과적으로 그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교를 하자면, 특정한 상황을 즉각적으로 포착한 사진과 달리 회화는 시간과 공간이 총체적으로 압축되어 용해된 종합적 시야를 개방시킨다. 아울러 화가 개인의 재능에 따라 관람자를 그림에 개입·몰입하게 하여 시·공간을 넘는 의미효과를 지속적으로 창출해 내기도 한다.
그가 그린 빛과 그림자
부족의 지도자이자 가장인 아브라함에게 후계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는 인간적 도덕에 대한 부정이다. 엄연한 살인일 뿐만 아니라, 가족을 보호할 책임과도 정반대에 배치되는 행동이다. 더구나 이삭은 신이 약속하고 예언한 결과이자 증거인데, 그 예언을 부정하는 신의 요구는 부조리한 요구이며 모순이다.
신앙과 인간적 도덕 사이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따라 순종하였고, 그 결과 믿음은 강화되었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였다. 아들에 대한 책임과 신앙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을 따르는 방향을 선택하였고 그의 선택은 옳았다. 이삭은 오른 쪽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별다른 저항 없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처럼 누워있다. 그렇지만 그의 세워진 무릎의 모양은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나이 어린 이삭이 자신의 죽음에 의심과 공포 없이 순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죽음 앞에 공포를 느낀다고 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인 이삭의 희생은 예수의 희생과 연결된다. 두 희생의 유사점과 별개로 결과는 달랐다.
이삭은 극적인 상황전환에 의해 장수를 누렸지만 예수는 고통스런 죽음 이후 부활하였다. 신의 아들과 인간의 아들이기에 그 차이가 생긴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한 담론은 과학이나 객관적 증거, 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 바깥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신학이나 철학적 담론의 대상으로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사례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