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원봉공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은애씨
문세경
은애씨가 처음 서울에 올라온 해는 1996년이다. 21살이던 그녀는 술만 마시면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싫어 무작정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잘 곳을 찾아 회현역으로 갔다. '여관'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자 여관 주인은 은애씨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자 여관 주인은 은애씨에게 '액자 파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회현 상가 지하에서 액자 파는 일을 한 달간 했다.
그러나 역마살이 끼었는지 은애씨는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힘들어했다. 서울에 왔지만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은애씨는 결국 부산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고 오면 엄마를 못살게 굴었어요. 아버지한테 대들지도 못하고 너무 무서웠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술을 마신 후 엄마를 또 때리길래 경찰서에 '아버지 좀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어요. 그런데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남의 집 일에 관여 안 한다면서 그냥 가더라고요. 그때 가슴이 아팠어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데 남의 집 가정일이라고 가는 걸 보면서 욕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났어요.
아버지가 너무 싫어 집을 나왔어요. 하루는 엄마가 걱정돼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버지가 받아 '가시나야, 네 뭐하고 댕기노'하면서 욕을 하더라고요. 저는 아버지 목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벌렁벌렁해져요. 그래서 그냥 끊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5년째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제가 집에 없었어요. 엄마랑 통화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알게 돼 장례식장으로 갔어요. 예전에는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는데 한 줌의 재로 나온 걸 보니 허무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장례식장에서 친척분들이 그랬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은애 너한테는 잘했다'라고요."
은애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엄마를 때리는 무서운 사람, 자식들에게 살갑지 않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폭력적인 아버지를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까. 은애씨는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엄마의 연세가 지금 65세예요. 20살에 저를 낳았대요. 아버지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고 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도망가서 살지 동생 두 명은 왜 낳았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엄마가 '느그들 불쌍해서 어떻게 도망을 가냐'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엄마는 농산물 시장에서 10년, IMF 터진 후 식당에서 7년 일하셨어요. 엄마가 바빠 끼니를 못 챙겨드렸더니 아버지는 매일 안주도 없이 술만 드시다가 간경화에 걸리셨어요. 엄마는 식당일을 하면서도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루도 안 거르고 했어요. 옆에서 지켜본 요양보호사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혼자 있기 외롭다며 저보고 집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며칠 못 있고 다시 나왔어요."
홈리스는 일할 의지가 없다? 그녀는 일이 하고 싶었다
은애씨의 방랑 생활은 전국을 무대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어느 지역에 가든 꼭 일을 했다. 일반적으로 '홈리스' 하면 게으르고 일할 의지가 없고 남에게 무언가 얻으려고만 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은애씨는 그렇지 않았다. '무섭고 춥고 배고픈' 노숙 생활을 피하려다 보니 더 열심히 일을 찾아 헤맸다.
"스무 살 초반부터 일을 했어요. 공장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3개월밖에 못하고 잘렸어요. 일터에서 나오면서 '나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 없어서 방랑 생활을 더 오래 한 것 같아요. 34살 때였나? 벼룩 신문을 보고 어느 큰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어요. '아무 일이나 다 할 수 있다' '찬밥 더운밥 안 가리고 일할 수 있다'고 했더니 이력서도 안 써 갔는데 합격했어요. 일을 하다가 오해가 생겨서 두 달 만에 잘렸지만."
은애씨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당시 고속터미널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데 노숙인을 위한 거리 상담을 하는 분이 은애씨에게 '열린여성센터'라는 곳을 알려줬다. 그곳에서 2년을 지낸 후 다른 센터로 옮겼지만 시설 리모델링으로 2년도 안돼 나오게 됐다. 당시 시설 관계자는 은애씨에게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에서 홈리스를 위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강좌가 있으니 마음 내키면 들을 것을 권했다.
"처음엔 인문학이 뭔지 몰라 안 하려고 했는데 면접을 보고 나서 내가 못 배우고 지식이 없으니까 꼭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결국 붙어서 일주일에 세 번씩 강의를 듣고 있어요. 인문학 수업을 듣다 보니까 '옛날에 어떻게 살아왔나' '과거의 좋은 일 안 좋은 일' 등이 생각났어요."
그녀는 인문학을 듣는 동기들과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은애씨도 가끔 카페에 글을 쓴다. 인문학 백일장에 참가해 상도 받았다.
집이 나에게로 온다. 나에게로 들어온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린다. 내 동생들도. 5식구다.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건축 미장 기술자였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부산 낙동강 옆에서 미꾸라지 잡는 데 일등이었다.
어느 날 부산 낙동강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가지고 오셨다. 개구리를 죽여서 만든 요리인 줄 모르고 잘도 먹었다. 먹고 나서 '아빠, 이게 뭔가요'라고 물으니 개구리였다고 한다. 배탈이 나서 죽는 줄만 알았다. 욱하고 토해낸 개구리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고 식겁했다. 그때 이후로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잘 안 먹는다.
먹고 나니 몸보신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이후로 내 몸도 건강해졌다. 지금은 그 아버지가 내 곁에 안 계신다. 돌아가신 지가 벌써 5년째다. 아버지,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더 그 개구리랑 미꾸라지를 푹 끓여주세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정으로." - 이은애 <마이하우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그리고 임신
무뚝뚝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였지만 은애씨의 글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이라 떠돌아다니는 게 좋다고 했지만 마음 붙일 곳,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닌 건 아닐까?
"25살에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한 남자를 만났어요. 나이는 나보다 어리고 키도 작았어요.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근데 그 사람이 그냥 좋았어요. 어느 날 그 사람이 아는 형한테 여자랑 있다고 전화를 건 후 경기도 시흥인가 하는 곳의 옥탑방을 얻었어요. 보증금은 그 사람 아는 형이 준 것 같아요. 시흥 옥탑방에서 그 남자와 살면서 회사에 다녔어요. 열심히 일해 번 돈을 그 남자한테 다 줬는데 6개월 지나니까 볼장 다 봤다는 듯 떠나버렸어요. 남자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다가 그 남자를 만나서 정을 주고 살았는데 배신을 당한 거죠.
지금은 거의 잊었지만 그때만 해도 상처가 컸어요. 기분도 울적하고 한동안 마음을 못 잡아 (부산)집에 가서 쉬었어요. 어느 날 숙모랑 같이 누워서 얘기하는데 저보고 왜 배가 불렀냐고 하시더라고요.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임신 6개월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실을 안 엄마는 아버지가 알면 둘 다 죽는다고 의사한테 울며불며 애를 지워달라고 사정했어요. 의사는 이미 아이의 눈, 코, 입 등이 다 생겼다고 안 된다고 했지만 매달리다시피 해서 결국 지웠어요."
의지할 곳 없던 은애씨는 영등포에서 노숙하던 남자를 만나 6개월간 함께 살았다. 임신한 줄 몰랐고 그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낙태를 했다. 아버지에게 못 받은 사랑을 받고 싶고, 외로워서 정을 주었는데 사달이 난 것이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남자는 처음부터 은애씨를 이용만 하고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당시 은애씨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임신과 낙태를 겪고 몸과 마음이 지칠 만도 했지만 은애씨는 일을 찾아 떠났다. 전라도와 강원도, 제주도로 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물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노숙만은 하지 않으려고 잠자리가 딸린 식당에서 일했다. 돈을 모아서 방 한 칸 이라도 얻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30대에도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허름한 고시원이 전부였다. 2018년도에는 코레일이 운영하는 노숙인을 위한 자활사업에 참여해 60만 원을 받았지만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25만 원의 고시원비를 냈고 반찬은 김치밖에 주지 않았다. 영양실조가 걸릴 것 같아 두 끼를 사 먹었다. 월급이 금세 바닥나자 은애씨는 다시 '열린여성센터'를 찾았다.
"열린여성센터에서 생활하면서 하루 두세 시간씩 자활근로를 하고 있어요. 센터에서는 방 하나에 세 명이 쓰고 있어요. 일반 사람들은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편히 쉬잖아요. 그런데 방을 세 명이 같이 쓰니까 코 고는 사람, 술 먹는 사람, TV 보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에요. 편하게 쉴 수가 없어요. 저는 여기 내년까지만 있을 수 있어요. 여기서 나갈 때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면 단칸방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입에 풀칠하려고 찬밥, 더운밥 안 가리고 일했어요. 쉰 적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지금 '집'이 없어요. 여기는 여러 사람이 같이 사는 시설이기 때문에 2년 후에는 자립해서 나가야 해요."
집을 간절히 원하는 은애씨는 열린여성센터 사회복지사의 권유로 지난 5월 장애 진단 검사를 받았고 지적장애 3급 진단을 받았다. 장애인 등록이 되어 있으면 임대주택 입주 자격으로 우선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하는 걸 힘들어하는 은애씨는 유독 영어 과목에 흥미가 있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다닐 때 주산 부기 타자 같은 과목은 힘들었지만 나이 많은 선생님이 가르쳐도 영어는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