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최영 장군의 왜구 토벌. 홍산대첩으로 불린다.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왜구가 동아시아 해역의 패권을 장악한 시점은 고려 해적들이 퇴조하는 시점과 거의 겹친다. 탐라 사람들과 가야·백제 유민들의 혈통을 계승한 고려 해적들은 한반도 남해안부터 양쯔강(양자강) 하구 주산군도에 이르는 넓은 바다에서 활약했다.
그들이 퇴조한 것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활약한 이후다. 그가 양쯔강 하구인 상하이 근처의 난징(남경)에 도읍을 두고 해적 소탕에 나서면서부터 고려 해적들이 약해졌다. 이 틈을 타서 왜구가 급속히 성장했던 것이다.
왜구의 활동이 본격화된 뒤 고려 해적들이 신흥 강국 명나라의 토벌에 밀려 해상에서 사라지는 모습은 <고려사> 공민왕 편(정식 명칭은 '공민왕 세가')이나 고려·명나라 사이의 공문서를 수록한 <이문(吏文)>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구의 득세로 인해 '성가신 존재'란 이미지가 한층 더 짙어진 '왜'는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가시면서 공포스런 존재'로 바뀌어갔다. 그러다가 1894년 이후로는 '조선을 집어삼킬 수 있는 존재'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중국군(명나라군)과의 대결에 부담을 느꼈던 일본군은 조선 땅과 서해에서 벌어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군(청나라군)을 대파했다. 그로 인해 조선인들의 눈에는 '왜'가 한층 더 두렵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조선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본격 행사한 일본은 11년 뒤인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조선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처럼 '왜'가 '성가시면서 공포스런 존재'에서 '조선을 집어삼킬 수 있는 존재'로 한층 더 무서워지는 상황에서, '토왜(土倭)'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막강해지다 보니, 일본에 빌붙는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토왜'가 사용됐던 것이다.
1904년, '토왜'의 등장
일례로, 의병장 유인석의 시문집 <의암선생문집>에도 그 표현이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유인석은 의병 동지이자 전 군수인 이경기에게 1904년 가을에 보낸 편지에서 "오늘날의 정세는 이전과 크게 다릅니다"라면서 "토왜가 경외(京外)에 가득하고 왜병 수만 명이 나라 안에 포진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토왜가 한양 안팎에 가득하다고 했다.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장된 을사늑약 전년도의 실태를 반영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