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용산역 광장에서 찍은 강제징용 노동자상.
김종성
육신만 힘든 게 아니었다. 정신도 극도로 힘들었다. 인권이 완전히 무시된 노역장이었기 때문이다. 위 이승우 논문은 "갑녀 등은 작업을 하는 도중에 곁을 보거나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고, 화장실에 갈 때도 허가를 맡아야 했고, 일본인 반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면서 "동료 중에는 작업 도중에 절단기에 왼쪽 집게손가락이 잘리는 상해를 입는 등 작업 도중 다치기도 했는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식욕이 왕성한 10대 중반인데도 식사 공급마저 제대로 받지 않았다. "식사의 양이나 질은 현저히 부실"하였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과중한 노동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주거나 여가도 제한됐다. "4평 정도의 좁은 방에서 6~8명이 함께 생활"했으며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도 사전 검열에 의해 그 내용이 제한"되고 "자유로운 외출을 할 수 없었"으며 "단체로 외출하는 경우에도 감시원이 동행"했다고 한다. 공장이 아니라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소녀 이영숙이 겪은 시련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공장 천장 위로 미군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소리도 인내하며 들어야 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도 참고 들어야 했다. 그런 속에서 옆도 돌아볼 새 없이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12월에는 대지진으로 공장 건물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쇠막대기가 옆구리를 관통하는 상해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죽는 것보다 못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봉급이라도 좀 나왔다면, 약간은 위안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 없었다. "원래의 약속과는 달리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임금을 지급받은 사실도 없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갑녀'뿐 아니라 소녀 이영숙도 그랬다. 금전적 대가는 없었다. 사실상 노예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아예 한 푼도 안 받은 것은 아니다. 허광무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심사과장의 논문 '일제 말기 강제동원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에 소개된 강제동원 피해자 김○봉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이분은 미쓰비시광업 다카시마탄광에서 강제노동·중노동을 경험했다.
"그때 몇 푼씩 줬어. 몇 푼씩 주기는 줬어. 그런데 배가 고프니까 콩 볶아 놓은 거 사먹고 고구마도 찌어 놓은 거 사 먹고 그랬지. 용돈도 안돼."
- 동북아역사재단이 2014년 발행한 <동북아역사논총> 제45호.
소녀 이영숙한테도 볶은 콩과 찐 고구마 사먹을 정도의 '용돈도 안 되는 돈'이 지급됐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지급됐더라도, '용돈도 안 되는 돈'이지 봉급은 아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소녀 이영숙은 봉급을 받지 못했다.
신장철 숭실대 교수의 논문 '일본 종합상사의 생성과 발전에 관한 연구-미쓰비시상사의 전후 해체와 재편성 사례를 중심으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래 인용문 속의 '불입자본금'은 '실질 자본금'과 동의어다.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로부터 1945년에 태평양전쟁의 패배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걸쳐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야스다의 4대 재벌 산하기업의 불입자본금은 4.3배로 증가하였다. 이 수치가 일본 회사 전체 불입금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 기간 중에 10.4%에서 24.1%로 증가되어, 전체 불입자본금의 4분의 1이 4대 재벌에 의해 차지되고 있었다."
- 한국경영사학회가 2011년 발행한 <경영사학> 제26집 제3호.
미쓰비시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에게 봉급은 주지 않고 '용돈도 안 되는 돈'만 줬다. 전 세계가 전쟁의 열풍에 휩싸였던 1937~1945년 기간에 미쓰비시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