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기차의 B노선. 아무래도 저 두 명의 남자가 수상하다...아무나 의심하지 말자.
이현숙
파리의 도둑놈은 재빨랐다. 도둑을 도둑님이라 할 수도 없고 도둑이라고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럴 때 마음 놓고 '놈'자를 써 보고 싶다. 기차에 올라 트렁크를 내 자리 옆에 놓고 출발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지 휴대폰 시계를 잠깐 보며 한숨을 돌리는 시간이 불과 10초나 20초 정도였을까. 내 옆에 있던 트렁크가 순간 없어졌다.
어? 둘러보아도 없다. 내 비명에 모르는 주변 사람들도 일어나 친절하게 이쪽저쪽 찾아봐 준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출발 전의 기차에서 얼른 내렸다. 그리고 무전기 들고 오가는 공항직원에게 말했더니 인포데스크에 우릴 데려다 놓고 기다리라고 한다.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게 하는 그들의 무심함에 화가 치밀어 직접 물어물어 미로 찾듯 공항경찰을 찾아갔다. 이때쯤 난 가방 찾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냥 맥없이 포기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파리 사람들의 이런 짓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분노와 멍청함으로 온전치 않은 정신의 내게 친절히 길안내를 해준 지나던 멋진 조종사와 젊고 착한 어느 공항 직원이 그나마 미쳐버릴 것 같았던 나를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육중한 철문의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인터폰으로 연결해줘야만 하는 또 다른 공항직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겁 없이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니 건장한 흑인 경찰이 우릴 맞는다.
경찰복으로 무장한 그 모습에 조금 두려움이 생겼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미 피곤하고 지쳤다. 정수기가 보이기에 물 좀 먹어도 되는지 물었더니 직접 한 잔 받아다 준다. 친절하군...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는 정식 절차에 따라 분실 신고를 하면 된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째야 하나 막막했지만 영어를 그런대로 받아주어 남편이 한참을 설명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조금 있더니 전화를 받아보라고 한다. 한국인 여자 불어 통역사였다. 세계 각국의 통역 장치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파리 경찰과 불어 통역사를 중간에 두고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했고 연락처와 연결방법 등을 남겼다. 전화를 끊기 전 그 통역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런데요... 크게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각자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서요."
아무튼 파리 공항경찰에서 마음껏 한국말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녀가 무조건 고마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경찰은 그것을 한 시간 정도 서류화 하느라 바빴고 우린 기다려 여러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서야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