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시우스 흉상
황인규
서양 학문에서 분류학은 계보학과 더불어 근대적 합리성의 토대를 이룬다. 서구의 근대를 연 계몽주의 학문이란 대상을 분류하고 역사성을 체계화시키면서 양자를 구조화한 것이다.
자연과학이 관찰과 실험이라는 귀납에 의존한다면, 인문학의 근저인 인식론은 추리와 논리라는 연역에 기댄다. 연역의 질료가 바로 분류이다. 분류가 되지 않은 인식은 그저 흙덩이 속의 광물질에 불과하다. 이를 정제하고 제련해 순금속으로 추출하여 개념화하는 것이 학문이라는 과정이다. 그러니 분류라는 사고의 과정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포유류'를 만든 사람
분류학하면 우리는 린네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생물책에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다. 세상의 동식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 린네 이전에는 이름이 없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우리가 '소'라고 이름을 붙인 가축을 영국인은 [cow], 일본 인은 [うし], 프랑스인은 [bœf], 아랍인은 [بقرة]라고 부른다. 이런 가운데 (당시 유럽에서)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라틴어로 학명을 붙인 이가 바로 린네다. 즉, 분류란 구별이 아닌 명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언어철학적 개념이 잠재돼 있던 것이다. 현대철학의 큰 줄기인 구조주의는 어쩌면 린네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에 의한 이름 붙이기는 계통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린네의 분류는 엄밀히 따지면 계통학이라고 해야 한다. 분류는 형태에 따른 구분이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계통은 형태 이전의 관계와 기능을 따진다. 즉 비슷한 형태일지라도 기능이 다르면 계통은 달라지고, 다른 형태일지라도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 같은 계통이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