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다우르스 극장에서'문학의 숲' 북클럽을 운영한 지 8년 만에 그리스 비극을 직접 보러 왔다.
조은미
야외 극장의 문이 열리자, 물밀 듯이 들어가는 인파. 우리는 극장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20대에 영문학 수업을 들을 때 교재 표지에 있던 극장 사진. 그곳에 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는 20유로짜리 표를 사서 극장의 가운데 정도 자리에 앉았다. 애벌리나가 이곳에서는 조그만 바스락 소리도 크게 들리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공연 중에 옆에서 물병이 떨어지거나 플라스틱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면 꽤 커서 주변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이 큰 극장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소리가 선명하게 뒤쪽까지도 잘 들렸다고 한다. 실제 보니 그렇다. 이번 연극에서도 대개 육성으로 하고, 신의 목소리 등을 연출할 때만 일부 마이크를 썼을 뿐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3명의 연출가가 각각 연출을 했다. 이번 연출가는 우연히도 모두 여성. 기본 이야기 골격은 유지하고 무대나 소품, 코러스의 연기 등은 연출가가 현대식으로 어느 정도 고쳤다.
3편 공연은 쉬는 시간도 없이 연달아 이어졌다. 오후 8시 반부터 시작해서 오전(새벽) 1시 30분까지.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없다.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영어 자막이 무대 양옆으로 있고, 우리는 미리 책을 다시 읽었으니 내용을 알고 있어 연극을 보는 게 수월했다. 밤공기가 점차 춥게 느껴지고 무대 앞 숲속 어둠의 그림자는 깊어졌다. 하늘을 올려보니 별들이 가득 돋아 있다. 1만 명 가까운 관객들 중 객석을 이탈하는 이가 드물다. 어떤 장면에서는 웃기도 하고, 한숨도 쉬면서 관객들은 연극에 빠져들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꼭 저들처럼 그랬으리라.
고대 그리스에 푹 빠졌던 5시간
<아가멤논>에서는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다부진 남성적 이미지로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여성 연출가라 요즘의 젠더적 관점이 입혀졌을까 잠시 생각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코러스의 모던한 춤사위가,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기독교적 제의의 느낌이 진한 결론부가 독특했다. 이렇게 고전은 끝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읽히며 우리 삶에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용으로 만들어진 제례음악과 춤이 발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 비극 3대 작가로 알려진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당시에는 비극 경연대회가 열리고 대개 3부작으로 공연하였다고 한다. 용맹한 장수이기도 했던 아이스킬로스가 <아가멤논> 등을 쓴 작가이고 비극 경연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열광했던 그리스 비극은 현재에도 '인간 정신의 심연'을 다루었다는 찬사를 받고 사랑받는다. 당시 아테네가 당면한 역사, 사회,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 이 작품들을 이해해야 마땅할 것인데,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끝없이 제기되는 정의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누가 정의로운가? 누구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고 누구는 단죄해야 하는가? 현대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