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한 남편은 결혼 초부터 은영씨에게 폭력을 가했다.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의 마지막은 남편의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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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남편의 배신에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듯 울산으로 내려갔다가 (목사님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토끼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네요. 두 번째 남편을 만나 꾸린 재혼 가정은 일반적인 재혼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남편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이 있었어요. 저는 아이를 못 낳으니까 딸이 있는 집안으로 결혼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남자가 소위 '마마보이'였어요. 돈을 벌면 자기 엄마한테 다 갖다주고 저에게는 주지 않았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도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맏며느리인데 막내며느리의 갑질 심했고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댁은 딸을 돌봐줄 '보모'가 필요했던 거고, 저는 남편이란 이름의 '남자'가 필요했던 거였어요.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만난 거였죠.
그럴 때마다 딸아이만 바라봤어요. 친엄마는 아니지만 따뜻하게 품었어요. 저와 딸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돈독해졌어요.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게 9살 때였어요. 친 모녀처럼 의지하며 지냈는데 딸이 25살에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슬펐는지 말로 다하지 못해요."
은영씨는 재혼한 남편의 딸을 성심껏 키웠다. 불임 때문에 더욱 아이에게 애착을 가졌다. 친엄마 이상으로 아이를 돌보자 아이도 은영씨에게 정을 주었다.
은영씨는 첫 결혼의 스트레스로 다낭성난소증후군이라는 진단과 함께 불임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재혼한 지 10년만인 43살에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임신이었기에 놀랐고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노산이었으니 걱정도 되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 꼭 낳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은영씨의 임신을 축하해주지 않았다. 전처가 낳은 딸만 잘 키워주길 바랐지만, 은영씨는 소중한 생명을 지켜냈고 10달 후 아들을 낳았다.
"시댁에서는 저의 임신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배 속에 있을 때는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잖아요. 산달이 다 되어 가는데 출산 준비를 하나도 못 했어요. 남편이 돈을 안 갖다주니까. 애는 나올 때가 됐는데 기저귀 하나를 준비하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교회 목사님하고 사모님이 어디서 기저귀를 얻어오셨어요.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걸 받자마자 삶아서 널었어요. 기저귀가 바람에 펄럭거리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재혼한 남편은 결혼 초부터 은영씨에게 폭력을 가했다.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의 마지막은 남편의 폭력이었다.
"술만 먹으면 그래요. 일주일에 다섯 번은 폭력을 썼어요. (허벅지를 보여주며) 여기 흉터 보이죠? 그릇을 던져서 이렇게 된 거예요. 이만큼이 벌어져서 꿰매야 하는 데 꿰맬 시기를 놓쳐서 꿰맬 수가 없대요. 그대로 아문 거죠. 이쪽(이마를 보여주며)도 여기저기 울퉁불퉁해요. 이게 다 맞아서 생긴 거예요. 갈비뼈도 부러져서 병원에 여러 번 입원했었고요. 도구를 쓰지 않으면 그나마 상처가 크지 않은데 어떨 때는 각목으로 때리고, 머리카락을 다 뽑기도 하고 그랬어요. 한 번은 남편이 사이다에 농약을 탔어요. 목을 졸라서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들이 말려서 살았어요.
시어머니는 아들이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보고 참으라고만 했어요. 샘도 많았어요. 누구 병원 가면 본인도 병원 가서 누워야 하고, 친구들이 어디 놀러 가면 본인도 놀러 가야 하고. 제가 친정엄마한테 하도 당하고 살아서 시어머니한테만큼은 정붙이고 살려고 했는데, 시어머니는 자신의 욕구를 다 채우면 싹 돌변하는 타입이었어요."
은영씨는 재혼한 남편의 폭력을 견디기 힘들어 여러 번 도망쳤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왔지만 보고 싶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약해져 다시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은영씨는 딸이 사고로 죽은 후 더 악몽 같은 세월을 보냈다. 결국 6살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수소문 끝에 여성긴급전화 1366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걸었고, 센터의 도움으로 여성노숙인 자활쉼터인 '내일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
1년 후 남편은 어떻게 알았는지 내일의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은 다시 아빠에게 갔고 은영씨는 6개월 후 다시 울산으로 가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이후 은영씨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다가 잡히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51살이었다.
"아이 아빠는 아들을 키운다고 해놓고 방치했어요. 오전에 일한다고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술 마시고. 아이의 끼니를 술안주로 해결하곤 했어요. 아동학대였죠. 아빠가 없는 동안 아이는 개 한 마리와 혼자 지냈어요. (중략). 아들과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으면서 마음이 무너졌어요. 이혼 후에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고시원에 살았어요. 아들을 하루빨리 데리고 오려고 악착같이 일했어요. 아들과 고시원에 살 순 없으니까요."
가정폭력 상담사, 새로운 꿈을 가지다
은영씨는 고시원에 살면서 '매입임대주택'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신청해 입주했다. 당시 아들은 울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5학년이 되자 혼자 은영씨를 찾아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은영씨와 남편 간 아이의 양육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폭력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이혼을 했지만 아이의 양육권을 갖지 못해 늘 전전긍긍하던 은영씨는 양육권 반환 소송을 했다. 은영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지인은 아들의 양육권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줬다. 친부에게 아이 양육에 대한 어떤 도움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뤄졌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은영씨는 두 차례에 걸쳐 내일의 집에서 살았던 소회를 말했다.
"아들이 6살이었을 때 처음 내일의 집에 간 거예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였어요. 다른 엄마들이 돈 벌어와서 자기 아이들 맛있는 것 사 먹일 때 참 서럽고 미안하더라고요. 햄버거 같은 거 사 와서 자기 아이만 먹이고, 다른 아이들은 먹고 싶어서 쳐다보고. 한방에서 20~30명이 오글오글 싸우면서 살았어요. 아이들끼리 놀다가 싸우면 엄마들이 말리다가 (감정이 격해져) 또 싸워요. 저는 나이 들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힘에 부쳐서 싸우지 못하니까 숨어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새벽 일찍 일어나 밥해 먹고 청소하는 건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엄마들끼리 이간질하고 싸우는 건 정말 힘들었어요. 거기다 아이 양육권을 찾기 전이라 애 아빠가 아이를 언제 데리고 갈지 모르니까 불안감도 상당했어요."
비슷한 이유로 쉼터에 온 이들과 함께 사는 게 힘들었다던 은영씨는 그래도 쉼터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와서 갈 곳이 없으니 노숙하기 직전이었죠.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어요. 힘든 일이 많았지만 내일의 집은 저를 내 집 이상으로 품어준 곳이에요."
그러나 쉼터는 임시거처이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다. 쉼터에 있는 동안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쉽게 방치됐다. 모든 엄마들의 걱정은 아이들이 시설에 남아 방치되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시설에 왔지만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망가진 몸과 마음의 치유가 필요했던 은영씨는 쉼터 생활을 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았다.
"친정엄마에게 받은 학대와 아바타처럼 산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상담사에게 엄마 이야기부터 했어요. '나는 엄마가 만든 인형이었고 엄마는 나를 통해 대리만족하며 살았다'고 말했어요. 상담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상담사는 듣기만 했어요. 그렇게 진통의 시간을 겪고 나니까 엄마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 보이고 엄마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을 때는 나 자신을 몰랐는데 상담을 하면서 내가 나아갈 방향이 보이고 아이와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은영씨는 현재 매입임대주택에서 아이의 양육권 찾을 때 도움을 받았던 분과 함께 살고 있다. 은영씨에겐 남편이, 아들에겐 새 아빠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