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명인 43호 감홍로 전수자 이기숙 명인
(주) 감홍로
감홍로는 별주부전에서 토끼가 용궁에서 마시는 술이자 춘향가에서 춘향과 이몽룡의 이별주로 등장할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술이다. 감홍로가 이기숙 명인에게 전수되기까지는 명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숱한 난관이 있었다.
이기숙 명인의 할머니가 되는 '박씨 할머니'가 4대째 이어지는 술도가의 시작이었다. '박씨 할머니'가 전수해 준 주조법을 이기숙 명인의 아버지인 고 포암 이경찬 선생이 이어받아 평양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 이기숙 명인은 "아버지로부터 한때는 평안도 일대에서 굉장히 번성했던 양조장이라고 들었다"며 웃음 지었다.
일제의 전쟁은 막바지에 치달았다. 양조장의 사정도 악화됐다. 해방 후엔 정치적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월남했다. 한국으로 내려온 이경찬 선생은 지금의 미아리에 양조장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술은커녕 먹을 양곡도 귀하던 시절. 정부는 술 빚는 것 자체를 금지했고(양곡관리법), 양조장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이 선생은 서울에 정착했고 1957년 다섯째이자 막내딸인 이기숙 명인이 태어났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고유의 전통주는 빠르게 잊혀졌다. 감홍로 또한 집안 제사나 행사 때 쓰는 가양주로 알음알음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
뒤늦게 전통주를 계승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변경이 있었다. 1986년 이경찬 선생은 문배주, 감홍로 등의 주조기술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86호(문배주 기능 초대 보유자)로 지정됐다. 훗날 문배주의 주조는 큰 오빠(이기춘), 감홍로의 주조는 둘째 오빠(이기양)가 이어받았다.
아버지의 길을 걸은 딸
젊은 시절 이기숙 명인은 자신이 나중에 직접 술을 빚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오빠들과 아버지를 뒷바라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낯을 가리는 타고난 여린 성정도 한 몫 했다. 아버지의 꿈을 두 오라버니가 잇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2000년, 감홍로 주조 명인이었던 작은 오빠가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만다.
감홍로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이기숙 명인밖에 남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감홍로를 보면서 자랐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술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다. 부담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랬던 이기숙씨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한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을 모르는 제가 유일하게 잘 아는 것이 그 술이었어요. 그런데 저 말고는 세상사람 모두가 그 술을 몰라주더군요." 자칫 문헌에만 남아 있는 그런 술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결정을 하고 보니 아버지의 다 못 간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러나 명인이 되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의 빈 자리가 너무 컸어요. 작은 오빠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주조법을 전수받았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도 없었죠." 2001년엔 감홍로에 대한 전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명인 지정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눈물 한 동이로도 모자라는" 시간이 이어졌다.
낙담만 하지 않았다. 우선 남편 이민형 대표와 함께 농업법인을 설립했다. 2005년엔 파주에 본격적인 시설을 갖춰 이듬해부터 감홍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주조법 전수 관련 증빙 서류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마침내 2012년 이기숙씨는 당당히 명인의 타이틀을 걸고 감홍로를 만들게 되었다.
명인은 오히려 그런 경험이 아버지를 더욱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30년이 훨씬 넘게 술을 빚으셨는데 저는 겨우 인정 받은 지 10년 남짓 됐습니다. 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힘든 길을 가셨는데도 결국 이 술을 지키셨죠. 저는 그래서 앞으로 걸어갈 길도 너무 걱정만은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보다야 고되겠나요."
"판매량보다 감홍로 본연의 모습이 더 중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