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이야기하며 우리 또래 남자들의 불안을 읽곤 했다. 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하는 문제, 즉 돈벌이에 대한 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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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하프타임'을 연재하면서부터 내 또래 남자들을 관찰하곤 한다. 핑계를 만들어서 지인들을 만나거나 통화하기도 하는데, 그들과 이야기하며 우리 또래 남자들의 불안을 읽곤 했다. 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하는 문제, 즉 돈벌이에 대한 불안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마다 그 불안의 모습은 결이 달랐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높은 연봉과 좋은 복지 환경에서 일하니 큰 걱정이 없으리라 짐작하는 시선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오래도록 지켜봐 온 대기업 소속 지인들은 나름의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중년 남성의 불안을 주제로 기사를 쓸 거라고 하자 언론에 노출되는 자체를 꺼렸다. 혹시라도 회사에서 알게 되면 불편해질까 해서다. 회사 이름과 직책을 소개하는 것조차 망설였다.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나와야 할까 봐 불안"
자격증과 전문 기술을 갖춘 A(53세, 파트장, 건설 부문, 20년 근속)와 B(55세, 부장, 건설 부문, 25년 근속)는 대기업에서도 특수한 업무를 맡고 있다. 두 사람 모두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해서 고용이 불안정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선택의 폭은 넓어 보였다. 특히 A는 "까짓거 내 회사 차리면 되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만큼 A가 맡은 업무는 그의 노하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B는 독립이 정답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대기업에 맡기는 일과 개인회사에 맡기는 일은 규모가 다른 데다 그 일이라도 따려면 영업을 해야 한다"라는 게 그의 우려다.
두 사람 모두 "그래도 회사에 남아 있는 게 여러모로 유리한 건 사실"라고 강조한다. 그들의 가장 큰 불안은 "재계약 시점에 언질 없이 연장이 안 돼서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20여 년 동안 해외 영업을 해온 C(54세, 부장, 전자 부문, 26년 근속)와 D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달라지는 직무 때문에 불안하다고 한다. 10년 넘게 해외에서 근무했고 이후에도 해외 영업만 했는데 회사에서 갑자기 국내 B2B(Business to business) 업무를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C는 몇 년 전 인사발령 때문에 한동안 갈등한 적도 있다. "(지시를)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을 걸어야 하나 고민했었죠." 물론 그는 회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비슷한 길을 걸어왔던 D(53세, 부장, 전자 부문, 24년 근속)는 최근 자회사로 발령 났다. 평생 해온 해외 영업이 아닌 생산 관리를 맡아야 했다. 그 역시 다른 길을 고민했지만, 회사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 "준비해둔 게 없어서 단 몇 년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거든요."
입사해서 27년을 사업 전략과 기획 업무만 해온 E(53세, 금융 부문, 27년 근속)는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는 느낌을 떠안은 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한때는 소속 팀원도 많았지만, 지금은 보직은커녕 뒤로 물러난 위치다.
"앞만 보고 달렸는데 뒤에 확 처지니까 내가 달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마라토너가 된 느낌이에요."
그는 오래도록 다닌 회사지만 자신의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불안을 느낀다. 특히 퇴사한 회사 선배들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기도 한다.
"자리가 바뀌고 업무가 바뀌는 게 그 신호의 시작이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잘 알죠. 그렇지만 해 온 업무밖에는 모르니까 회사를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두려운 거죠."
"그래도 급여가 밀리는 불안은 없잖아요"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기업에 다니면 급여가 밀리거나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잖아요."
지난 20년간 벤처 회사 네 곳을 옮겨 다닌 김아무개(52)씨의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1990년대 말 벤처 붐이 일 때 작은 IT 기업으로 옮겼다. 창업투자회사에서 투자를 받은 회사는 그 돈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했고, 그도 대기업 연봉을 웃도는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벤처의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매출은 없는데 계속 투자만 하더라고요. 3년쯤 되니 급여일이 밀리기 시작했고 그 상황이 몇 달 이어졌어요."
김씨는 헤드헌터를 통해서 대기업 계열사에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망한 벤처에 다닌 직원을 뽑아 주는 곳은 더 작은 벤처 회사밖에 없더라고요." 그는 그 후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네 번째 회사인 현 직장에 다니고 있다.
업무는 원래 하던 기획 파트에 더해 마케팅과 홍보는 물론 자금 유치와 재무관리까지 맡고 있다. 직급이 부사장이라 회사 사정을 잘 아는 만큼 다음 급여일에 월급이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
"대기업에 다니면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잖아요."
서비스를 중지한 어느 인터넷 금융 회사 강아무개(53) 상무의 말이다. 그는 현재 소수의 직원과 회사 청산 업무를 하고 있다. 그는 대형 광고대행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벤처 붐이 일 때 게임 회사로 옮겼고, 그 후 마케팅과 홍보 업무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급여가 나오지만, '청산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라는 단서 때문에 미리 떠나갈 곳을 찾아야 하는 처지다.
"이리저리 인맥과 헤드헌터를 통해서 회사를 알아보고 있지만, 나이가 걸리네요."
그들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