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 15일자 <경향신문>.
경향신문
이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에 있었다. 이번 북한 어선 사건보다 훨씬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해 9월 15일 밤, 약 20명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동해·삼척·정동진보다 북쪽인 강릉 해안에 공작원 3명을 내려줬다. 이틀 뒤인 17일 밤, 그 3명을 데려가려고 잠수함이 다시 나타났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군경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17일 밤에 재출현한 잠수함이 임무를 마치고 무사 귀환했다면, 국방부는 아무런 욕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3명을 태우려고 해안가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잠수정이 기관 고장을 일으켜 암초에 부딪히면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잠수정이 파손되자 승조원 전원이 상륙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금의 국방부보다 훨씬 많은 비판을 당시의 국방부가 받아야 했다.
북한 잠수정의 좌초를 최초 목격한 사람은 해안 경계병이 아니었다. 해안가를 지나가던 택시 운전사 이진규 씨였다. 그는 18일 새벽에 현장을 발견하고 1시 35분에 신고했다. 해안 초소의 소대장이 상부에 보고한 시각은 새벽 2시였다. 2시 약간 전에 해안 초병이 발견하고 소대장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경계병보다 먼저 잠수정을 발견했으니, 군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포된 공비 이광수의 진술에 따르면, 15일 밤에 공작원 3명이 잠수함에서 내린 곳은 국군 초소에서 20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경계병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군의 경계 태세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방부 발표의 진실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1996년 9월 21일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19일 오전 10시 10분에 있었던 무장공비들과의 첫 교전 뒤에, '군경수색대가 공비 3명을 사살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하지만, 이들 3명이 사살된 게 아니라 자살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오면서, 의도적인 허위 발표가 아니었느냐는 의혹도 나왔다.
발표는 '3명은 사살되고, 11명은 집단 자살했다'에서 '11명도 AK 소총에 의해 사살된 것 같다'로 수정됐다. 공작원 내의 누군가가 AK 소총으로 나머지 생존자들을 죽인 것 같다는 쪽으로 발표가 바뀐 것이다. 이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군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사건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선 원인 제대로 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