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부경찰서(당시 대구경찰서) 내 전시실에 게시되어 있는 박중양의 모습. 사진 아래에 '박중양은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46년 당시 시민들은 잠시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기도 했다.
대구중부경찰서
대구 시민들이 항의 시위가 큰 규모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군중들이 시위에서 가장 많이 요구한 것이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였는데(<신편 한국사>), 일제 강점기 때 독립지사를 고문하던 친일 경찰이 해방이 된 후에도 시민을 쏘아 죽였으니 사태 악화는 불을 보듯 뻔했다. 군중은 한때 대구경찰서를 점거했다.
당시 대구는 건국준비치안유지회·탁치반대공동투쟁위원회·대구공동위원회 등을 좌파와 우파가 함께 꾸려가고 있었다. 해방 이후 대구의 좌파 진영은 유연한 전술·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지역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이는 미군정의 탄압에 밀려 좌파가 약화된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9월 총파업 투쟁도 대구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함께 이끌었다. 이에 대해 <신편 한국사>는 "대구의 파업이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좌파 진영의 의도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다. 다만 그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대구·경북 좌파 진영의 존재가 있었다"라고 진단했다.
"불행한 사건... 우리 민족의 아픔"
10월 1일 시작된 대구의 항쟁은 도시 외곽으로 확산되었다. 경북 전역으로 번져간 항쟁에는 32만 명이나 되는 민중이 참여했다. 민중은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 식량난과 생활난 해결, 미군정 정책 정상화, 좌익인사 석방, 민주주의 실현 등을 요구했다. 전국으로 번진 항쟁은 12월 8일 전북 전주에서 막을 내렸다.
<대구시사>는 1946년 10월의 참사에 대해 "10월 1일에 경찰과 노동평의회 사이의 마찰로 시작되어 10월 2일에 노동자와 학생이 경찰을 무장해제하고 폭도화하여 일으킨 대구에서의 무력 폭동 사건"으로, 사흘 만에 "대구에서만 사망자가 27명, 부상자가 61명, 건물 파괴가 156건이나 되는 막심한 피해를 내고 전국적 사회혼란을 초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는 사상적 혼란 속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으로, 이후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살해 과정을 거쳐 지금도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라고 평가했다. 표현 속의 '피비린내 나는 살해 과정'은 1947년 7월 19일의 여운형 암살, 1949년 6월 26일의 김구 암살 등은 물론 이른바 보도연맹 집단 학살을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