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추미전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넘쳐나는 것이 글쓰기 교본이다. 서점마다 글쓰기교본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다. 나도 글쓰기 교본을 적잖이 읽어 봤지만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를 보니 최근 출간되는 글쓰기 교본 대부분이 3백여 년 전 연암 박지원이 제시한 글쓰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이 책은 소설 형식으로 글쓰기의 기본을 가르치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연암 박지원이 문체반정(박지원의 글을 비롯한 소품문의 유행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정조가 직접 나서 글쓰기를 바로 잡겠다는 뜻으로 시행한 고문 회복정책)으로 궁벽한 시골에 잠시 은거하게 된다.
그때 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퇴락한 양반 김향서가 아들 지문을 데리고 연암을 찾아온다. 과거 시험을 통과해 출세하고 싶은 꿈을 지닌 17세 청년 지문은 아버지 손에 끌려 얼떨결에 연암 밑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배우게 된다. 글을 배우러 온 지문에게 연암은 대뜸 묻는다.
연암 : 자네는 몇 자나 아는고?
지문 : 네?
연암 : 몇 자나 아느냐고 물었느니라.
나름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천자문>과 <사서삼경> <사기> 등을 공부해 온 지문은 이 질문에 몹시 당황하는데 나도 이 질문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누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지문은 "아는 글자가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내가 든 생각은, 글자를 아는 기준이 연암과 같다면 나 또한 "아는 글자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암이 '아는 글자'라고 하는 것은 그 글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를 일컫는 말이었다.
연암이 지문에게 내린 첫 번째 훈련은 책을 천천히 읽으라는 것, <논어>를 대부분 외우고 있기까지 한 지문은 책을 천천히 읽는 일이 오히려 어렵다. 우리 시대는 어떤가? 속독이 독서의 기본 훈련이 된 시대, 수학능력시험의 지문이 한 페이지에 달해 빨리 읽는 것이 독서의 최대 덕목이 된 이 시대에도 천천히 읽는 훈련은 필요할까?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어야 책과 내가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문은 <논어>를 천천히 읽으면서 그동안 단순히 외우느라 놓쳤던 의미를 비로소 다시 깨치고 천천히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
저자는 이 책 자체가 '박지원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전부 실제 박지원의 글에서 가져왔다고 출처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연암이 가르치는 글쓰기 기법이 요즘 나오는 글쓰기 교본의 기본과 놀랄 정도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연암의 글 중에 단연 가장 공감을 이끌어 내는 부분은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한 부분이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句)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